◇ 시인과 시(현대)

박유라 시인 / 대명사 '그'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23. 08:00
박유라 시인 / 대명사 '그'

박유라 시인 / 대명사 '그'

 

 

 주말 판 「책의 향기」 행간에 굵은 밑줄이 그어진다

 유리창 너머 흔들리는 밑줄처럼 바람이 지나가고

 저 타블로이드판 크기의 풍경 속 한없이 '그'가 가고 있다

 

 히말라야에 오르다 친구를 잃는다. '눈사태 속 60초' 아주 잠깐 동안의 일이지만 손가락 하나 잡아 줄 수가 없다. 그 후 친구의 딸을 자신의 딸로 키워 20년이 지난 뒤 히말라야로 데려간다. 그러나 딸이 발견한 것은 발자국이 끝나는 지점 거기, 설산을 덮으며 날아가는 그림자

 이제는 아버지가 아닌 다만 대명사 '그’

 

 그 밑줄을 부여잡고 나는

 국립 중앙도서관 점심 테이블에서 테이블

 주어와 술어 띄어쓰기와 명사를 넘어

 우동 한 그릇 국물 위에 비치는 나뭇가지와 까치를 넘어

 출렁이는 하늘을 한 칸 씩 뛰어넘어 식기반납대로 간다

 쑥갓 한 잎이 그 뒤를 구불터구불텅 따라가고

 한 겹씩 벗겨지는 나, 빈 그릇

 

 화장실 스위치를 올린다

 선명하게

 몸을 훑고 지나가는 잎새

 이제는 다만 대명사 '그’

 

-시집 『푸른 책』(현대시시인선 22) 중에서

 

 


 

 

박유라 시인 / 언덕 위의 염소

 

 

가도 가도 그 자리

풀밭 벽에서 반야를 되새김질하는 염소들

눈조리개 몽롱히 열어 옴쭉옴쭉 방정맞게

여기서도 옴 저기서도 옴 옴을, 오물거리며

 

해가 가마솥 풀빵만큼 부풀어오른 정오

라디오에서는 흘러간 옛노래가 메들리로 나온다

손가락 장단을 한 번씩 퉁겨 올릴 때마다

부드럽게 흐르는 턱과 턱 능선에서

침에 섞여 노래와 풀들이 잘게 으깨지고

한나절 언덕이 잘 반죽되고 있다

부풀어 올라라 부풀어 올라라 풀 풀 풀

해가 서쪽 목책에 종잇장처럼 가볍게 걸릴 때까지

내일 아침 한 통 하얀 젖이 흘러나올 때까지

 

산사나무꽃은 하염없이 지고

부는 바람 하루, 이틀, 사흘,......

내가 매일 목을 놓아먹이는 것은 무엇일까

옴,마,니,밧,메,훔,아,주,공,갈,염,소,똥,십,원,에,열,두,개,떽,떼,굴,

염소 엉덩이께에서 흘러나오는 따끈한 구름들

 

 


 

​박유라 시인

1957년 부산에서 출생. 1987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야간병동』 『갈릴레이를 생각하며』 『푸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