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유석 시인 / 우리들의 공동체. 1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23. 08:00
김유석 시인 / 우리들의 공동체. 1

김유석 시인 / 우리들의 공동체. 1

1.

유년 시절, 도랑에서 참게 한 마리를 주위 나무통에 넣었는데 이튿날 감쪽같이

사라졌다.

오래 움츠린

혈거穴居의 힘으로

혼자 두면 악착같이 벼랑을 기어올라 달아난다.

​2.

여러 마리를 잡아다 통에 넣자

몇 날을 거품만 문 채 그대로다.

고집처럼

딱딱하게 굳은 생의 각질 탓도 있거니와

구멍 밖 세상 너무 환하여

먼저 기어오르는 게의 발목을 뒤 게가 물고 뒤 게를 그다음 게가 붙들고 늘어져

서로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김유석 시인 / 우리들의 공동체, 2

​거미가 공중에 줄을 치는 행위는 모종의 트릭trick이다.

모자 속에서 새를 꺼내거나 손수건을 장미로 피워내는 일보다는 좀 더 그럴듯하다 할까, 줄 하나로 설정하는 기하학적 공간은

여러 개의 홑눈을 겹쳐 만든 만화경과 같다. 이를

날개 없이 허공을 공유하는 족속들의 생존방식이라 이른다면

줄에 걸려드는 하루살이의 생태 또한 미필적 놀이에 가깝다. 실상과 허상의 접점에서

흰 비둘기와 붉은 장미를 꺼내 보이고

기다림이란 고상한 배고픔을 걸어두기도 하는 일 모두 하루살이의 몫,

욕망과 파멸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학적 유희를 즐기다가

끈적끈적한 미망에 휘말려 드는 건 거미의 최면이 아니라, 필경

스스로에게 속아 넘는 하루살이의 자작극일 것이다.

 

 


 

김유석 시인

1960년 전북 김제 출생. 전북대학 문리대를 졸업. 198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신월기계화단지〉가 당선되어 등단. 201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 『상처에 대하여』 『놀이의 방식』 『붉음이 제 몸을 휜다』. 2015년 제5회 웹진 『시인광장』 시작품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