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혁 시인 / 시간의 거인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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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혁 시인 / 시간의 거인
그는 시간이 뭔지 몰라서 시간이 없다 몇 살인지 모른다 손바닥에는 생명선이 없다
달팽이 기어가는 것을 한없이 바라보고 강가에 앉아 흐르는 물을 보고 싶을 때까지 본다 그는 시간이 너무 없어서 이 세상 사람인가 의심스럽다
그는 시간이 없으면서도 시간을 가지고 논다 새들이 하늘을 빙빙 돌 듯 우리가 살고 있는 직선의 시간을 구부려 원으로 만들며 논다
사라지는 것들 안에는 시간이 있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없어서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도 몇 천 년이 그의 몸에 붙어 있는 듯하다
존재했음을 보여 주는 시간이지만 그 앞에서는 시간마저 존재하지 못한다 그래서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오직 하루를 아직도 살고 있는지 모른다 이 세상에 황혼이란 절대 없다는 듯이
이미 세상을 떠난 누군가가 이곳을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는 알까? 그 초연함을 알까? 하지만 그는 기쁨만이 있다
영화를 볼 때나 술 마시는 쾌락 안에는 시간이 없듯이 지금 몇 시야? 시간을 묻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시간이 없어서 그는 기쁨의 근원을 지니고 있다
시간이 없으니 바라는 것도 없고 상처도 없고 누구에게든 기쁜 얼굴인 그에게 바쁜 시계를 던져 주고 시 분 초를 알려 줘도 심심하게 들여다본다
시간과 무한한 거리감을 지닌 그는 하늘을 봐도 기쁘고 먹을 것이 없어도 기쁘고 옷이 다 찢어져도 기쁘고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서두르는데 그는 시간이 없어서 봉숭아 물든 손톱을 어제 보듯 본다 그래서 등이 맑다
시간이 없는 그는 몇 천 년 된 나무 속에서 잠자다 윙윙 벌 소리에 끌려 밖으로 빠져나온 것 같다
시간이 없는 그는 어쩌면 시간이 너무 많아서 시간의 수위가 넘친 저수지에 완전히 잠긴 자일지도 모른다 한 시간만이라도 시간의 수문을 열어 줄래?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슬며시 내 등을 건드리는 그는 가끔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가 보는 눈빛과 우리가 가 버렸다고 생각하는 시간을 천천히 당겨 오는 손을 가졌다
-시집 『드디어 혼자가 왔다』 에서
정진혁 시인 / 내 전부는 밖에 있어서
처음 이 가방은 다른 가방과 똑같은 표정을 가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얼룩이 생기고 때가 타고 색도 조금 바랬다 멜빵 한쪽이 뜯어지고 자크 하나가 고장 났다 가방은 훨씬 자신만의 표정을 가진다 이 표정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가방에 넣은 컴퓨터와 책과 간식거리와 옷들에 가방의 영혼이 잠든다 커피를 쏟은 얼룩과 손때 묻은 책들은 가방에 자신의 존재를 반영하며 가방에 침투하고 끝내 가방으로 변신한다 모든 것은 외부로부터 온다 아무렇게나 벗어 논 가방 위로 아침의 햇살이 비칠 때 우중충하고 냄새나는 가방이 환하게 빛난다 우중충한 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들로 빛난다 몇 십 년째 이 세상을 벌고 있는 나는 있음의 눈동자를 지닌 나는 외부로부터 온 것이다 멀어지지 않는 헌신과 소유하지 않는 말투를 지닌 나는 그리고 저녁을 바라보는 자세가 영혼을 가로지르는 나는 외부로부터 온다 나무를 느끼는 마음과 곧장 가지 못하고 빙빙 도는 붉음을 지닌 나는 너를 보는 내 전부는 너라는 외부로부터 온다.
-시집 『드디어 혼자가 왔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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