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고영 시인 / 원고지의 힘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25. 08:00
고영 시인 / 원고지의 힘

고영 시인 / 원고지의 힘

 

 

원고지를 놓고 막상 책상에 앉고 보니

무엇을 쓸 것인가

그대에게 못다 한 진정의 편지를 쓸까

하늘에게 사죄의 말씀을 쓸까

달리의 늘어진 시간에게 안부나 물을까

막상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

지난 여름 내게만 사납게 들이치던 장대비가

원고지 칸과 칸 사이를 적시고

목적지도 없는 폭풍의 기차가 지나간다

기차가 끌고 가는 기―인 강물 위

빠져 죽어도 좋을 만큼 깊고 푸른 달이 반짝

말라비틀어져 비로소 더욱눈부신

은사시나무 잎이 떨어진다

지난 과오가 떠오르지 않아 얼굴 붉히는 밤

수천 마리 피라미 떼가

송곳처럼 머릿속을 쑤신다

눈에 보이지 않아 더 그리운 것들

원고지를 앞에 놓고 보면

분명 내 것이었으나 내 것이 아니었던

그 전부가 그립다

 

-『분명 내 것이었으나 내 것이 아니었던』에서

 

 


 

 

고영 시인 / 쓸어내린다는 말

 

 

한 사람을 쓸어내린 적 있다

 

​아비가 어미를 쓸어내리듯

기러기가 하늘을 쓸어내리듯

자작나무가 자작나무를 쓸어내리듯

빗자루가 지구를 쓸어내리듯

눈물이 눈물을 쓸어내리듯

쓸어내려야 할 것이

쓸어내려야 할 것들을 쓸어내리고 있다

연못이 파문을 쓸어내리듯

바다가 파도의 가슴을 쓸어내리듯

거짓이 거짓을 쓸어내리듯

밥알이 배고픔을 쓸어내리듯

기쁨이 슬픔을 쓸어내리듯

 

쓸어내려서 오히려 더 쓰라린 사람도 있다

 

ㅡ시집 <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 시인동네, 2024

 

 


 

고영 시인

1966년 경기도 안양 출생, 부산에서 성장. 2003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딸꾹질의 사이학』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 천상병시문학상, 고양행주문학상,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제1회 <질마재해오름문학상> 수상. 현재 계간 《가히》 발행인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