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조극래 시인 / 모래여자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25. 08:00
조극래 시인 / 모래여자

조극래 시인 / 모래여자

 

 

 모래여자가 목덜미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몹쓸 그리움이 밀려들 거예요

 

 그녀의 이목구비가 흘러내리고

 한순간 불어본 하모니카 노래라며

 일기장을 불살랐는데

 내 말투에는 여전히 모래 알갱이가 묻어있다

 

 백사장 건너편에는 스쳐 간 연인을 조문하는 우체국이 있고 사서함에는 한때의 파도 소리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버스 뒷좌석 여자가 사탕처럼 빨아먹던 통화음

 단골이라며 꽃물 들던 민박집 아주머니는

 우체국이 폐국된 건 이십 년도 더 지났을 거라고 한다

 

 옛터는 사라져도 집요하게 속을 긁어오는 몸살이 있어서

 늙은 배롱나무는 땡볕에 제 몸을 널어 말리고

 

 어쩌면 그녀는 내가 짜 놓은 무대 안에서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번 싹이 튼 의심은 무럭무럭 자란다

 

 저만치 여자가 파도에 허물어지며 실성한 듯 웃는다 공중에 울음을 휘젓던 남자 무릎이 망가지고

 구름이 연주하던 악기를 부러뜨려도 비가 자라는 밤

 창문은 열려 있다

 아기 새가 되어 주둥이를 벌리고 어미 새를 기다리는 것처럼

 

 비가 꿈에 물을 부어준다 모래여자가 내 볼을 만지고 있는 장면을 내가 훔쳐보고

 

 파도 소리가 꿈의 뼈를 잘게 부순다 백사장에 서식하던 발자국 떼가 무수히 날아오른다

 

 


 

 

조극래 시인 / 구부러진 웃음

 

 

내 꽃무늬 파자마는 앙다문 울음에 천박한 웃음을 박음질한 것이다

 

안간힘을 써도 씻가시지 않는 일곱 살,

장롱문을 연 아버지는

오도카니 앉은 나를

술김에 볼기짝 때렸다는데

 

팔월의 오후를 다 태우고도 서러운 울음은

꿈 밖으로 뛰쳐나와 빗소리로 변주되고

그리하여

 

미운털이 한 뼘씩 웃자라던 감정은

아무나 씨에게 연분홍 인사를 건네는 고마리꽃으로 피어나고

 

그래도 가끔

 

거울 속 나를 눈돌림질 하며

아침 독백을 저녁 방백으로 줍는 날로 덩굴지지만

 

딱딱한 액자 속에서 뜬눈으로

썩지 않는 통증을 씻고 계실 아버지

꽃잎도 없이 핀 고마리꽃이나마

한 다발

건네나 줄 걸 그랬네

-시집 <오늘은 빈둥거림이 수북하고>

 

 


 

조극래 (趙克來) 시인

1963년 경남 통영 출생. 경상대학교 영문과 중퇴,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창과 졸업. 1999년 《문예사조》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답신』 『오늘은 빈둥거림이 수북하고』. 창작집 『초보시인을 위한 현대시 창작 이론과 실제』. 제3회 시산맥 창작지원금 수혜. 2023년 경남문화예술 지역문화예술육성 지원사업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