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혜신 시인 / 걷는 여자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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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혜신 시인 / 걷는 여자
펑퍼짐한 단발머리, 조그만 키, 게이트 밖으로 나가는 일도 없이 어둑해지면 아파트 주변을 천천히 걸어다니는 그녀는 중년의 아들을 돌보며 산다고 했죠, 머리에 문제가 좀 있다는 하지만 아들을 본 적이 없죠
먼 별의 사이렌 소리가 실로폰 소리처럼 깨어지는 아주 평범한 밤들을 자폐, 아닌 듯 우울, 아닌 듯 그녀는 홀로 걷죠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 듯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듯
창밖으로 그녀가 그렇게 지나가는 밤이면 나는 뒤척입니다 문제 삼지 않는 문제같이 평정을 회복한 어둠 그런 밤의 적막 속으로 터질 듯이 공급되는 슬픔은 대체 얼마만큼 불평등해서 우리는 끝없이 살아남아야 하는 것일까요
오, 불면의 밤바람이여 지는 라일락 향기같이 낭만적인 당신의 음률 속에 걸어가는 저 여인의 이름을 기록해주세요 (늙은 엄마)
임혜신 시인 / 천사는 바쁘거든
누군가, 긴 두레박 같은 팔을 내려 우물에 빠진 널 건져주고 뜨거운 생선 수프를 먹여주고 상처들을 싸매주더니 어느 날 아침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면 숲속처럼 깊고 아늑한 방 위스테리아향기 가득 널 남겨두고 '난 할 일 다 했거든'이라는 한 마디 문자도 없이 떠나갔다면 맞아 천사
-시집 『베라, 나는 아직도 울지 않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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