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은후 시인 / 타워크레인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27. 08:00
김은후 시인 / 타워크레인

김은후 시인 / 타워크레인

 

 

잣나무 밑동에 사다리가 걸쳐져 있다.

작년 가을, 이氏아저씨 마지막 나무에 오른 흔적이다.

흔들리는 공중, 마지막 잡았던 힘

걸어서 내려오라고 누군가 치우지 않은 길이다.

꼭대기에 열매를 달아놓는 습성

사람을 겨냥한 나무의 비책 같다.

 

사다리는 나무의 飛階쯤 될까

신갈에서 용인 가는 어디쯤 중단된 공사장

타워크레인 꼭대기에 승강기가 매달려 있다

자본의 열매가 하나 둘 떨어져 오르내리는 것을 잃은 크레인

이氏아저씨는 잣나무 밑동쯤에

직립을 거두어들이고

사다리를 비워놓았듯.

 

나뭇가지 물어 나르던 새들 집은 늘 비어있다

半月은 빈 달이 아니듯

나무는 새 열매를 얻어 계절을 채워갈 것이고

높은 곳은 비어있는 때가 많아 空中.

 

지상과 몸 바꾸며

계절의 이름을 만들어냈듯

없는 사람을 따라간 계절은 간절기쯤 될까

누군가 잡고 흔드는 듯 공중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다.

 

 


 

 

김은후 시인 / 맞배 바람 맛을 보다

 

 

강구항 시장 끄트머리쯤

바다다슬기 수북한 함지박 앞에 놓고

빙글빙글 졸고 있는 할머니

한 종지에 얼마예요

나선의 좁은 끝까지 들어갔던 잠에서 후르르 돌아 나온다

이곳에 오래 사셨냐고 물으니

구불구불 동피랑 고갯길을 가리킨다

 

삶은 다슬기 하나 집어

앞뒤 좁은 바람으로 쏙쏙 빨아들인다

맞배 바람의 맛이다

종지에 가득 담긴 다슬기들, 맞배 바람이라 해도 될까

톡톡 다슬기 꽁무니 끊어내던 밤들

하루에도 열두 번 꽁무니를 빼고 싶었을 날들은 없었을까

가랑이 앞 붉은 함지박 속 비릿한 것들

수북이 앞가림해주기 바빴던 자식들

이젠 다 팔려 나갔단다

 

맞배 바람은 어금니까지 쓸 일도 없는 맛

주전부리 작은 맛에 맞배창이 달리고

할머니 가랑이 앞 함지박에는 푸른 다슬기가 담겼다

우주의 밀도가 다슬기 속으로 들어가 임계밀도가 되는

내밀한 나선체

종(種)이 다른 바람이 부는 휘파람을 듣는 저녁

노을 다 빠진 서쪽이 빈 다슬기 껍질 같다

 

 


 

김은후 시인

경남 통영 출생. 한신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2011년 《시인동네》로 등단. 시집 『분간 없는 것들』 『2퍼센트의 동화』. 2016년 수원문화재단 문화예술지원금을 수혜, 2017년 상반기 세종도서 문학나눔과 2017년 경기문화재단 전문예술창작지원 문학분야에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