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영 시인 / 아나모르포시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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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영 시인 / 아나모르포시스
찌든 먼지가 들러붙은 장롱 철제봉 끝부분에 스트라이프 무늬의 낡은 넥타이 하나 걸려있다 그런데 이게 뭐지 이 넥타이의 주인은 벌써 고혼이 되었는데 불현듯 붉은 빛깔의 저 장롱 속에서도 혼백이 느껴져 나는 혼쭐이 나간다 낯익고도 낯선 붉은 사각의 모퉁이에서 우연히 이루어진 이 짤막한 조우 아침부터 죽죽 비가 내린다 내 시선 저 너머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그는 매일 이 매듭을 매었다 풀었다 했나 시간의 행불행을 저 사선의 스트라이프 무늬 속에 줄줄이 쟁여두고 있었나 한때 선명하고 샤프했을 넥타이의 줄무늬는 이제 희미하다 왜상(歪像)처럼 일그러져 있다 접신하듯 그 앞에 서서 나는 무심히 나를 보던 그의 눈빛을 만난다 늙고 병들어서 모른 척한 건 아니라고 알지, 나의 왜상은 당신이었다고 나는 찌들게 꼬인 시간의 먼지를 탁탁 턴다 그리고는 줄무늬의 결대로 넥타이를 돌돌 말아 모질게도 종량제 쓰레기봉투에 쑤셔 넣는다 유품은 소각하는 것이 맞지만 나는 그에게 혼꾸멍날까 서둘러 발길 돌린다 빗줄기는 어느새 가늘어져서 비를 맞아도 내 눈꺼풀에선 아무것도 떨어져 내리지 않는다
—《다층》 2015년 가을호
한미영 시인 / 사초를 하며
몇 년 만에 찾아간 봉분에는 장대비에 패어나간 자리가 흉하게 남아 있습니다 흙 속에나 깊이 묻혀 있어야 할 시간들이 새어나와 서성입니다 아득한 저승길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시간이 이렇게 길을 끌고 나와 있습니다 새순 대신 돋아 나오는 잡초들은 모두 뽑아 버리기로 합니다 공설묘지 입구에서 사 들고 올라간 마른 떼뭉치를 풀어 봉분을 덮습니다 죽은 적막을 감싸안기라도 하듯 활개 뒤에서 양팔 벌리고 선 아카시나무 몸통도 낫으로 쳐냅니다 굵은 가지를 찍을 때마다 심하게 우는 소리들이 터집니다 어쩌면 진통제를 맞으며 마지막을 버티셨던 당신이 신음을 다시 토하는지도 모릅니다 밑동까지 완전히 잘려진 나무 오히려 편안해 보입니다 사초제를 맞으며 체념하듯 저 혼자 눈을 감습니다 누구에게나 마지막은 이렇듯 적막한가요 오래 전 이 흙 속에 묻힌,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버지의 시선처럼
-시집 〈물방울무늬 원피스에 관한 기억〉(문학세계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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