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윤은영 시인 / ㄸ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27. 08:00
윤은영 시인 / ㄸ

윤은영 시인 / ㄸ

변기에 물띠슈 금지

공중화장실 문짝에 붙은 경고문에서

고모가 튀어나왔다

채석장의 부스러지는 돌처럼 살았다 고모는

할머니의 매운 손에 떠밀려 어느 집 식모로 간 날 밤

꽁꽁 언 별의 결정에 찔린 상흔이 육십까지 이어지고 있단다

이미 습관이 된 불면이 당겨 온 아침은 산뜻하지 못하고

오늘도 두통은 바늘 끝처럼 관자놀이에 박힌다

시작부터 내 것이 아닌 삶,

망각은 기억보다도 편했다 그래서일까

일자무식이어도 세상은 다 읽을 줄 안다며 큰소리를 치지만

정작 샤인머스캣은 사인머시기포도가 되고

조카 영준이는 용준이가 된다

이른 아침 고모가 청소하러 가는 곳, 화장실이 아니라 똥간이다.

왠지 된소리 하나로 천박하게 들리는 말 같지만

힘주고 살아 온 인생을 입말로 응축시킨 낱자가 아닌가

예사소리로는 도저히 그 기구한 사연을 다 풀어낼 수 없다는 듯이

메인 목구멍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물기 날아간 낱자인 것이다.

-웹진 『시인광장』 2025년 8월호 발표

 

 


 

 

윤은영 시인 / 아버지는 바닥이다

 

 

계속 바닥이다가 한 번씩 숨 쉬러 올라가는 날이 있다

 돈이 사람을 따라오게 해야 한다 사람이 돈을 따라가선 안 되지

 품 안에 든 돈 다 써버리는 우리 아버지, 존경스럽다

 여섯 번째 카센터 육천만 원으로 육성시키고

 한 푼 내주는 일 없이 딸 하나 월세방 전전하여 야속하지만

 아버지는 원래 바닥이었고 그저 물려받고 사는 핏줄 두꺼운 삶이다

 반세기 모은 돈 육천만 원 전부면

 아버지 그저 남은 인생 즐기다 가셔요 하는데

 바닥, 그게 좋아 아버지마저 지하 셋방 장롱 한 짝 들여놓지 못해

 행거에 걸린 사계절 옷들만 주름이 깊어갈 뿐

 후드득 비듬일지 모르는 하얀 세월이 떨어져 아버지와 함께 살갑게 낡아간다

 올라가야 할 길 놔두고 그냥 바닥인 게 좋다는 우리 아버지.

 

 


 

윤은영 시인

1982년 인천에서 출생. 숭의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201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시옷처럼 랄랄라』. 제3회 전국 계간문예지 우수작품상 수상. 현재 『미네르바』 편집위원, 한국문인협회 모국어가꾸기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