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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by 파스칼바이런 2010. 4. 9.

< 스스로 김삿갓이라 부르니..>

방랑시인 김삿갓

  

 

김삿갓 그의 본명은 김병연이다.  그렇다면 김병연 그가 왜 김삿갓을 자처하고 한평생을 방랑했는가!!  그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구차할지 몰라도 상황설명이 꼭 필요하다.

  

1826년(순조 32년)에 김병연은 백일장을 보게 되었다.

백일장이란 초야(草野)에서 학문을 닦고 있는 무명유생(無名儒生) 들에게, 학업을 권장하기 위해 각 고을 단위로 글짓기대회를 하는 일종의 지방과거((地方科擧)와 같은 것이다.  

이때  김병연의 나이는 갓스물, 자(字)는 성심((性深)이요, 호(號)는 난고(蘭皐)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전후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 통달 하였다.  게다가 시재(詩才)가 남달리 특출하고 역사에 각별한 흥미를 느껴 오고 있었던  그는, 고금의 시서(詩書)와 사서(史書)를 닥치는 대로 섭렵(涉獵)해 왔기 때문에 모르는 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본시 글공부만 좋아했을 뿐이지 공명심이나 출세욕같은데는 관심이 없었던 김병연이 이날 백일장을 보러 온 것은 홀어머니 이씨의 간절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인데 오늘날의 공무원시험 과도 같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이날 백일장의 시제는 다음과  같았다.

 

<정가산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보라.>

論鄭嘉山忠節死 (논정가산충절사) 嘆金益淳罪通于天 (탄김익순죄통우천)> 이였다.

 

 

이 시제는 홍경래의 난과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홍경래가 평안도 용강(龍岡)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순조 11년인 1811년 신미년(辛未年) 12월의 일이었다. 홍경래는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라고 자칭해 가면서 반란군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대는 가산(嘉山).박천(搏川)을 함락시키면서 서울로 남진(南進)하였고, 다른 1대는 서북(西北)으로 진격하여 곽산(郭山). 정주(定州). 선천(宣川) 등을 불과 며칠 사이에 모두 석권(席捲)해  버렸다.

그 통에 가산 군수(嘉山郡守) 정 시(鄭蓍)는 반란군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가산 군수 정 시는 문관(文官)이면서도 그러했건만, 선천방어사(宣川防禦使) 김익순(金益淳)은 국가 안보의 중책을 맡고 있는 무관(武官)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이 쳐들어오자,  싸우기는커녕 즉석에서 항복을  해버렸다.  그런 까닭에 정부는 반란군을 진압시키고 나자, 김익순을 역적이라는 낙인을 찍어 참형에 처해버렸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시제로 나오자 김병연은 평소부터 반란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가산 군수 정 시를 <천고의 빛나는 충신>이라고 존경해  왔던 반면에, 김익순을 <백번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만고의 비겁자>라고 몹시 경멸해 오고 있었다.

  

[비겁하고 용렬하기 짝이 없는 김익순이란 놈을 백일장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마침 잘 만났다. 오늘은 나의 필봉(筆鋒)을 마음껏 휘둘러, 비겁하기 짝없는 네 놈을 뼈도 못 추리게 탄핵(彈劾)하리라.] 하며 거침없이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신하라고 불려 오던 너 김익순은 듣거라

정공은 문관이면서도 충성을 다하지 않았더냐

너는 적에게 항복한 한나라의 이 릉(李陵) 같은 놈이요

정 시의 공명은 송나라의 악비(岳飛)처럼 길이 빛나리로다.

 

曰爾世臣金益淳  (왈이세신김익순)

鄭公不過卿大夫  (정공불과경대부)

將軍桃李 西落  (장군도이롱서락)

烈士功名圖未高  (열사공명도미고)

 

시인은 이런 일에 분개하지 않을 수가 없기에

칼을 어루만지며 물가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노라

선천은 자고로 대장이 지켜 오는 큰 고을이기에

가산보다도 의를 앞서 가며 지켜야 할 곳이 아니었더냐.

 

詩人到此亦慷慨  (시인도차역강개)

撫劍悲歌秋水   (무검비가추수사)

宣川自古大將邑  (선천자고대장읍)

北諸嘉山先守義  (북제가산선수의)

 

두 사람은 다 같은 조정의 신하였는데

죽어서야 할 곳에서 어찌 두 마음을  먹었더란  말이냐

태평성대와 다름없던 신미년 그 해에

관서에서 풍운이 일었으니 그 무슨 변괴이더냐

 

淸朝共作一王臣  (청조공작일왕신)

死地寧爲二心子  (사지영위이심자)

升平日月歲辛未  (승평일월세신미)

風雨西關何變有  (풍우서관하변유)

 

주 나라를 존중하려고 충신 노중련이 나왔고,

한 나라를 돕기 위해서는 제갈량이 나왔듯이

우리나라에도 만고의 충신 정가산이 나와

풍진을  맨손으로 막아 내려다 죽지 않았더냐

 

尊周孰非魯仲連  (존주숙비노중련)

輔漢人多諸募亮  (보한인다제모양)

同朝寯臣鄭忠臣  (동조준신정충신)

抵掌風塵立節死  (저장풍진립절사)

 

 

전사한 충신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 갈 것이니

그 이름은 가을 하늘에 태양처럼 빛날 것이요,

혼백은 남묘로 돌아가 악비와 같이 살게 될 것이고

뼈는 서산에 묻혀 백이 숙제와 이웃하게 될 것이로다.

 

嘉陸老吏揭名族  (가륙노리게명족)

生色秋天白日下  (생색추천백일하)

魂歸南畝件岳飛  (혼귀남무건악비)

骨埋西山傍伯夷  (골매서산방백이)

 

서북으로부터 개탄할 소식이 들려오기에

어느 가문에서 나온 벼슬아치냐고 물어 보았더니

문벌은 명성이 드높은 장동 김씨요

항렬은 장안에서 소문난 순(淳)자 돌림이 아니더냐.

 

西來消息慨然多  (서래소식개연다)

問是誰家食綠客  (문시수가식록객)

家聲壯洞甲族金  (가성장동갑족김)

名字長安行列淳  (명자장안행열순)

 

가문이 훌륭하여 성은도 두터웠을 것이니

백만 대적 앞에서도 의를 굽히지 않았어야 할 것을

청천강물에 고이 씻긴 병마는 어디다 두고

철옹산에 간직했던 궁시(弓矢)는 어떻게 했단 말이냐.

 

家門如許聖恩重  (가문여허성은중)

百萬兵前義不下  (백만병전의불하)

淸川江水洗兵波  (청천강수세병파)

鐵甕山樹掛弓枝  (철옹산수괘궁지)

 

임금님 앞에 꿇어 엎드리던 바로 그 무릎으로

서북 흉적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했으니

너는 죽어 황촌에도 못 갈 놈이라

저승에는 선대왕이 계실 것이니 말이다.

 

吾王庭下進退背  (오왕정하진퇴배)

背向西域凶賊股  (배향서역흉적고)

魂飛莫向九泉去  (혼비막향구천거)

地下猶存先代王  (지하유존선대왕)

 

 

너는 임금도 배반하고 조상도 배반한 놈

한 번 죽어서는 너무 가볍고 만 번 죽어야 마땅하다

춘추의 필법을 너는 아느냐 모르느냐

치욕적인 이 사실은 역사에 남겨 길이 전해야 하리라.

 

忘君是日又忘親  (망군시일우망친)

一死猶輕萬死宜  (일사유경만사의)

春秋筆法爾知否  (춘추필법지부)

此事流傳東國史  (차사유전동국사)

 

 

이런 시로 그는 장원급제를 했고 술한잔 걸쭉하게 걸치고 행복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그의 홀어머니에게 자랑을 시작하였는데 이게 웬일인가!

이야기를 듣는 도중 어머니가 갑자기 기절하시고 이내 정신을 차리시며 이제까지 숨겨오셨던 그의 집안 내력을 눈물 흘리시며 가르쳐 주시니 바로 김익순이라는 사람이 김병연의 할아버지이였던 것이다.

반역자는 3대를 멸하라는 그때의 법에 따라 마땅히 김병연도 죽어야 했지만 어머니가 김병연을 데리고 깊은 곳에 숨어사시고 도망도 다니시면서 김병연의 공부 뒷바라지를 하신 것이다.

언젠가는 그가 집안을 다시 일으켜 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서 집안내력을 숨겨왔는데 오늘과 같은 일이 터지고야 만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를 욕되게 하고 장원급제를 하였으니 그것도 반역자의 후손으로 말이다.

뒤에 어머님이 말씀해주시길.  그의 할아버지는 술취해 주무시고 계시다가 갑자기 쳐들어온 반란군에게 포로로 잡히신 것이었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반항하실 틈도 없으신 것이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그 말에 김병연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죽을 생각도 하며 울기도 하다가 문득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고 그의 아내와 이제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아이와  김병연만 바라보며 한평생을 살아오신 어머니와 가슴 아픈 눈물을 뒤로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으니. (앞으로 하늘을 우러르지 못하는 죄인이니 삿갓을 쓰도록 하며 김병연을 지우고 김삿갓으로 스스로 부르리라.)

 

<가난한 자의 비애>

 

김삿갓이 관동과 관북의 접경 지대인 안변으로 접어 들 때의 일이다.

관북 땅으로 접어드니, 산세가 더욱 험준하고 인가도 더욱 희소하여 진종일 걸어가도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첩첩 태산만이 있을 뿐, 인가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김삿갓은 배가 고프면 솔잎을 따먹기도 하였고, 때로는 칡뿌리를 캐어 먹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치만은 어디를 가도 절경이어서, 눈요기는 그렇게도 진수 성찬일 수가 없었다.

 

깊은 산 속을 걸어오기를 사흘만에 처음으로 오막살이 한 채를 발견하였는데 감자농사를 지어먹고 살아간다는 그 집은 가난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창호지는 몇천 년 전 여와씨 시대의 종이처럼 새까맣고, 방안에는 천황씨(天皇氏) 때의 먼지가 그대로 쌓여 있었다.

저녁밥을 특별히 대접한답시고 보리밥을 지어 왔는데,  보리가 몇십 년이나  묵은 쌀인지, 보리밥 빛깔이 새빨갛게 절어 있었다.  김삿갓은 하룻밤 신세를 지고 나서, 다음날 아침 그 집을 떠나며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었다.

 

계곡따라 종일 가도 사람 하나 못 보더니

겨우 겨우 강가에서 초막 한 채를  찾았소

문에 바른 창호지는 여와 때의  종이요

비를 들어 방을 쓰니 천황 때의 먼지로다.

 

終日綠溪不見人 (종일녹계불견인)

辛尋斗屋半江濱 (신심두옥반강빈)

門塗여와元年紙 (문도여와원년지)

房掃天皇甲子塵 (방소천황갑자진)

 

새까만 그릇들은 우나라 때 구운 건가

새빨간 보리밥은 한나라 때 곡식인가

떠날 때 주인에게 고맙다 말했지만

간밤 일 생각하면 암만해도 입맛 쓰네.

 

光黑器血虞陶出 (광흑기혈우기출)

色紅麥飯漢倉陳 (색홍맥반한창진)

平明謝主登前送 (평명사주등전송)

苦思經宵口味辛 (고사경소구미신)

 

 

현실이 아무리 고달파도 그것을 익살스럽게 시로써 읊어 버리면, 그 나름대로 즐거웠던 김삿갓,  현실이 우리를 괴롭게 할 때가 많다.

나이가 먹어갈 수 록 그것은 반비례하는 것 같다.   때로는 웃어버리자.

미친 사람처럼 눈물이 날 정도로 웃고나면  모든 것을 등지고 떠난 김삿갓이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을까.  하여 나는 그가 부럽다.

 

 

김 삿갓! 그는 누구인가..

 

김 삿갓은 안동 김씨로서, 그의 '안김'이 60년의 세도를 하는 이른바 황금시대에 김씨 일문으로 태어났으면서도 불우한 환경속에서 자학과 방랑으로 일생을 마찬 사람이다.

이와 같이 된 까닭은 순조 11년에 발생한 홍경래의 난 때,  그의 조부인 김익순이 평북 선천부사로 있었는데 싸워보지도 못하고 반군에 항복했다가 난이 평정한 뒤 자신은 참형을 당하고 , 김삿갓의 일문은 폐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김 삿갓의 본명 은 김 병연으로서 호는 난고라 했다.

순조 7년 3월 13일 양주에서 출생했으며 아버지는 김 안근이고 어머니는 그 성씨를 알 수 없다. 자녀로서 학균과 익균의 두 아들이 있고 딸도 있었던듯 하다.

아뭏든 김 삿갓의 본명은 그 방랑생활을 통해 남긴 수많은 시에 있었다.

특히 김 삿갓은 조선팔도 구석구석까지 안간데가 없었고 금강산은 거의 해마다 찾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철종 15년(계해년 ) 3월 29일 전라도 동보땅에서 일생을 마치기까지, 그는 거의 평생을 두고 방랑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워낙 세상을 떠돌다보니 그가 묻힌 곳이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1982년 향토사학자 박영국씨(작고)가 집요한 추적과 고증 끝 에 와석골에서 삿갓 무덤을 찾아냈다.

오직 '김삿갓 뫼는 양백(태백- 소백)지간, 영월-영춘 어간에 있다'는 고문서 기록 하나에 의지했다 고 한다.

와석골은 강원 경상 충청 3도에 걸친 도계 접경지.

"동네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어요. 바깥사람들만 몰랐죠." 그 동네 신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