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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15158

정규범 시인 / 23.5 정규범 시인 / 23.5 달과 지구가 몸을 섞을 때 태양은 그들을 비추어 기울기를 엿보고 지구가 바다에 길을 열 때 바다는 엉덩이를 들썩여 푸른 주름 편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혹등고래의 울음소리에는 북극에서 적도까지 흐른 물의 향기가 젖어 있고 저 빙하 위 밀려가는 훔볼트펭귄의 깃털에는 남극에서 적도까지 이른 생의 역사가 새겨 있다 23.5도는 달과 지구의 사랑 축 해류는 지구의 리듬에 따라 물결 나누고 대류는 달의 입김에 따라 계절 바꾼다 해류가 토해낸 향기 바람이 숙성한 영토 기울기에 기댄 생명의 순리 부비새의 푸른 발, 인드라 원숭이의 허공 지키려고 달이 차오를 때마다 지구도 꽁지에 힘을 모은다 플라스틱이 바다의 양수를 찌르고 문명이 대지의 사지를 자르는 것은 달과 지구의 꼬리를 뽑아 생명의 축을 .. 2023. 6. 3.
이영광 시인 / 로보캅 이영광 시인 / 로보캅 로보캅은 달려간다 로보캅 속에 누가 들어 있다 로보캅은 사람 같다 사람이다 로보캅 슈트 속의 누가 달려간다 로보캅과 사람이 달려간다 로보캅과 내가 달려간다 어느 벌판의 짐승도 그렇게 달리지 않고 어느 하늘의 새도 그렇게 날지 않는다 어느 구멍 속 벌레도 그렇게 기지 않는데, 슈트를 뒤집어쓰고 로보캅이 달려간다 내가 달려간다 피 흘리며 생각하는 인간이 달려간다 계간 『시로여는 세상 2023년 봄호 발표 이영광 시인 1967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 고려대 영문과 및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빙폭〉 외 9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 『그늘과 사귀다』 『아픈 천국』 『나무는 간다』 『끝없는 사람』 『래를 오래 바라보았다』가 있음.. 2023. 6. 2.
허수경 시인 / 동백 여관 외 2편 허수경 시인 / 동백 여관 눈이 왔다 울음 귀신이 동백처럼 붉은 전화를 길게 걸어왔다 절[寺]은 눈처럼 흩날렸고 산은 눈처럼 흐느꼈고 아무도 잠들지 못하던 방은 눈처럼 떠나갔다 허수경 시인 / 베낀 구름을 베낀 달 달을 베낀 과일 과일을 베낀 아릿한 태양 태양을 베껴 뜨겁게 저물어가던 저녁의 여린 날개 그 날개를 베끼며 날아가던 새들 어제의 옥수수는 오늘의 옥수수를 베꼈다 초록은 그늘을 베껴 어두운 붉음 속으로 들어갔다 내일의 호박은 작년 호박잎을 따던 사람의 손을 베꼈다 별은 사랑을 베끼고 별에 대한 이미지는 나의 어린 시절을 베꼈다 이제는 헤어지는 역에서 한없이 흔들던 그의 손이 영원한 이별을 베꼈다 오늘 아침 국 속의 붉은 혁명의 역사는 인간을 베끼면서 초라해졌다 눈동자를 베낀 깊은 물 물에 든 고.. 2023. 6. 2.
김유석 시인 / 깡통 외 2편 김유석 시인 / 깡통 툭, 차버리고 싶은 감정과 툭 차이는 감정 중 소리를 내는 것은 어느 쪽일까 채워지기 전과 채웠다 비워낸 공간 가운데 어느 편이 더 시끄러울까 통과 깡통의 차이, 깡통을 차다와 깡통 차다 사이 만들어질 때 미리 담긴 소음인지 비워진 후의 울림인지 깡 찬 소리가 난다 몇 배 새끼를 빼낸 뒤 뱃가죽 축 늘어진 늙은 돼지를 이르기도 하는 속된 말, 깡통이 뭐길래 깡통을 보면 차고 싶어지나 그 속에서 뭐가 튀어 나와 참새들을 화들짝 놀라게 하나 깡통을 깡통으로만 아는 순 깡통들, 납작하게 눌러 밟아버리면 차라리 나을 건데 톡, 톡, 누군가 자꾸 나를 걷어차기만 한다 김유석 시인 / 천형天刑 네 쌍의 눈을 달고도, 공중거미는 먹이를 직접 사냥하지 못한다. 형체가 흐릿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공.. 2023. 6. 2.
김정임 시인 / 탄생 외 2편 김정임 시인 / 탄생 ​ ​ 너는 지금 오고 있다 ​ 어미의 몸속은 전생을 숨기기 가장 좋은 곳 몸 밖으로 미끄러져 나오는 순간 너는 너를 잊게 될 거다 ​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이곳의 하루가 시작될 테지만 ​ 하나의 별이 바람과 구름을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와선 ​ 저것 봐 너를 번쩍 들어 올려서 바오밥나무 주위를 빙빙 돌던 수많은 어미들이 저마다의 저녁 속으로 돌아가네 ​ 따뜻한 불빛과 눈가를 적시며 뒤돌아보게 하는 음성 ​ 너를 기다리는 오늘이 대지에 입을 맞추고 무릎만 남은 양초처럼 나는 흘러내릴 테지 빨간 방울 모자를 쓴 너의 울음이 점점 가까이 오는 동안 김정임 시인 / 야외 음악당에서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새가 날아갔다 북쪽으로 날아가는 새의 자유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 2023. 6. 2.
윤후명 시인 / 강릉 별빛 외 2편 윤후명 시인 / 강릉 별빛 강릉 바닷가에서 별을 바라보는 것은 이 삶을 물어보는 것 이 삶이 지나면 다시 올 거냐고 어느 바다를 지나 다시 올 거냐고 물어보는 것 그러면 별은 물고기가 되어 멀리 헤어가기만 한다 하물며 별은 먼 향내에 빛난다 따라서 강릉 바다의 향내는 먼 별의 모습 우리가 살아 있는 지금을 가장 멀리 빛내는 별의 모습 강릉 바닷가에서 별을 바라보는 것은 지금 살아 있음을 되새기며 이 삶의 사랑을 물어보는 것 윤후명 시인 /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이제야 너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너무 늦었다 그렇다고 울지는 않는다 이미 잊힌 사람도 있는데 울지는 못한다 지상의 내 발걸음 어둡고 아직 눅은 땅 밟아가듯이 늦은 마음 홀로 #등불 을 #상처 위에 켜다 모두 떠나고 난 뒤면 등불마저 사위며 .. 2023. 6. 2.
박완호 시인 / 나무의 발성 외 2편 박완호 시인 / 나무의 발성 씨앗이라고, 조그맣게 입을 오므리고 뿌리 쪽으로 가는 숨통을 가만히 연다. 새순이라고 줄기라고 천천히 좁은 구멍으로 숨을 불어 넣는다. 길어지는 팔다리를 쭉쭉 내뻗으며 돋아나는 가지들을 허공 쪽으로 흔들어 본다. 흐릿해지는 하늘 빈자리 연두에서 초록으로 난 길을 트이며 이파리가 돋고 꽃송이들이 폭죽처럼 터지는 순간을 위해 아직은 나비와 새들을 불러들이지 않기로 한다. 다람쥐가 어깨를 밟고 가는 것도 몰래 뱃속에 숨겨둔 도토리 개수가 몇 개인지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한다. 하늘의 빈틈이 다 메워질 때쯤 무성한 가지들을 잘라내고 더는 빈 곳을 채워 나갈 의미를 찾지 못할 만큼 한 생애가 무르익었을 무렵 가지를 줄기를 밑동까지를 하나씩 비워가며 기둥을 세우고 집을 만들고 울타리를 .. 2023. 6. 2.
이현서 시인 / 안개도시 외 2편 이현서 시인 / 안개도시 밤이면 해안선을 따라 바다는 스멀스멀 피어올랐습니다 발자국도 없이 밤을 건너는 샤먼의 영혼처럼 내밀한 비의를 감춘 습문들 출렁이는 마음의 장력이 허공을 거느립니다 흔적을 지우며 먼 곳에서 흘러왔을 물의 입자들이 때늦은 고백처럼 난해한 문장 속에서 울음을 꺼내면 밀입국한 후생이 삐걱 문을 열고 젖은 몸의 기척들이 자욱한 밤을 건너갑니다 우르르 지하로 몰려든 사람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도 눈먼 자들의 도시*로 이주 합니다 창백한 시선들이 수묵의 농담濃淡으로 몸속에 그림자를 가둡니다 습곡마다 달의 궤도를 이탈한 소리들을 만지며 혼자 우는 밤, 집요하게 젖은 영혼들이 서로에게 잊혀져가는 늪 파란 정맥을 타고 흐르던 연민이 어둠속에 풍장 되고 있습니다 이현서 시인 / 그립다는 말 ‘그립다.. 2023. 6. 2.
신동호 시인 / 저물무렵 외 1편 신동호 시인 / 저물무렵 황혼이 어깨 위에서 오래도록 머물러주길 바랬습니다 손때를 많이 탄 느티나무 밑둥으로 풀벌레들이 기어드는 무렵 언덕으로 저녁연기가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마음 한 켠이 아득해지고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아 거기엔 당신이 있었습니다 겨울 하늘에 맨 돌팔매질 하던 황혼이 물든 들녘을 이내 바라보고 섰던 언덕배기엔 썰매타기와 연날리기가 아이들을 기다리고 쓸쓸한 저녁을 위해, 저물 무렵 못내 그리운 마음의 아련함이란 그 때문일까요 낮 동안, 그래서 아이들이 피운 부산스러움과 먼지더미는 아름다운 게 아닌지요 언덕배기에 앉으면 당신이 자라온 마을과 지나온 길이 함께 어두워져 가고 그때 불어오던 바람이 아 당신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던 사람들 많았기에 가슴 시리지 않던가요 .. 2023. 6. 2.
유종인 시인 / 안경을 바라보며 외 4편 유종인 시인 / 안경을 바라보며 벗어놓은 안경은 골똘함이 직업 같다 거실에 놓였어도 광야를 내다보듯 은애(恩愛)의 훤칠한 시력을 불러보는 침묵 같네 인간을 벗었으니 누가 쓰면 마뜩한가 섬잣나무 등걸이나 고물이 된 자전거에 아니면 외눈박이 고양이 그대 한번 써볼 텐가 스러지는 향기한테 콧등 높여 씌워보면 주니가 든 시문(詩文)한테 훈김처럼 씌운다면 백리향 만리향이 번질까 송뢰(松籟)품은 애체(靉靆)여 유종인 시인 / 월척 올봄에는 무엇이나 이 눈물겨움이 월척일세 어미 몸을 먹고 자란 거미 새끼도 월척이고 우주의 모래알 같은 외사랑도 월척일세 유종인 시인 / 마음 하루는 눈물 글썽한 상거지가 다녀갔다 또 하루는 꽃도 없이 바위가 그늘졌다 오늘은 술이나 받게 죽통(竹桶)처럼 비었다 유종인 시인 / 답청(踏靑).. 2023. 6. 2.
최갑수 시인 / 지붕 위의 별 외 3편 최갑수 시인 / 지붕 위의 별 요즈음엔 지붕 위로 올라가는 날이 잦다 내가 누군가를 지나치게 그리워하고 또 그 그리움으로 인해 깨진 저 서녘 하늘처럼 가슴이 아프다는 말이 아니다 아직도 누군가를 못 잊어 못 잊어한다는 말이 아니다 지붕 위의 빛나는 별이여 어느 날 그대라고 불리웠던 내 가슴속 단단히 못박힌 이여 당신을 사랑했었단 말은 더더욱 아니다 별이 진다 이 밤 누군가 이별의 맑은 꿈을 꾸고 있는가 보다 최갑수 시인 / 밀물여인숙 2 바다가 밤을 밀며 성큼 뭍으로 손을 내밀고 아낙들이 서둘러 아이들을 부른다 겨울밤은 폐선의 흔들림을 감당하기에도 벅차고 내 잠을 밀고 촘촘히 올라오는 잡어떼 별처럼 삼십 촉 백열구가 떴다 아직도 잠들지 못한 걸까, 홑이불 속 사고 싶은 것이 많다는 그 여자도 따라 뒤척인.. 2023. 6. 2.
한창옥 시인 / 배회 외 5편 한창옥 시인 / 배회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의 눈빛이 자석처럼 빨려들게 한다 주파수를 잃은 무성음에 눈물이 고인다 오롯이 마음 준 사람을 내려놓지 못하고 돌아오지 않는 숱한 꿈을 기다리며 까맣게 타들어간 상처는 또 다른 욕망을 배회하다가 해안의 어깨를 빠져나오고 있다 해운대 바다의 모래알만큼이나 신열을 앓던 시간들이 차마 만질 수 없어 갈매기 따라 무리지어 날아오른다 가장 비릿하고 뻐근하게 다가서는 소리 없는 몸짓이 미련스럽지만 선혈을 쏟아내며 떠오르는 태양을 끌어안고 해돋이 마중에 뗏목처럼 밀려오는 무겁게 눌린 시간을 주섬주섬 털어버린다 한창옥 시인 / 팝콘 아가의 말문이 톡톡 터진다 엄마의 웃음이 팡팡 터진다 꽃이 피는 것은 나무만이 아니다 안방에서 마루에서 꽃망울 마구 터진다 가을햇살 품고 오는 바람.. 2023. 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