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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갑수 시인 / 지붕 위의 별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6. 2.

최갑수 시인 / 지붕 위의 별

 

 

요즈음엔

지붕 위로 올라가는 날이 잦다

내가 누군가를 지나치게 그리워하고

또 그 그리움으로 인해

깨진 저 서녘 하늘처럼

가슴이 아프다는 말이 아니다

아직도 누군가를 못 잊어

못 잊어한다는 말이 아니다

지붕 위의 빛나는 별이여

어느 날 그대라고 불리웠던

내 가슴속

단단히 못박힌 이여

당신을 사랑했었단 말은 더더욱 아니다

 

별이 진다

이 밤 누군가

이별의 맑은 꿈을 꾸고 있는가 보다

 

 


 

 

최갑수 시인 / 밀물여인숙 2

 

 

바다가 밤을 밀며

성큼 뭍으로 손을 내밀고

아낙들이 서둘러

아이들을 부른다 겨울밤은

폐선의 흔들림을 감당하기에도

벅차고 내 잠을 밀고

촘촘히 올라오는 잡어떼

별처럼 삼십 촉 백열구가 떴다

아직도 잠들지 못한 걸까,

홑이불 속

사고 싶은 것이 많다는 그 여자도

따라 뒤척인다 뒤척인 자리마다

모래알들이 힘없이 구르고

곧 허물어질 것만 같은 등

나는 입술을 대고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러본다

그 여자의 등이 조금씩 지워진다

어느 땐가 내가 서 있었던 해변과

사랑하는 것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해보던

사납던 그 밤도 지워진다

여자의 등에 소슬하게 바람이 일고

만져줄까, 하얗게 거품을 무는

그녀의 얇은 허리와 하루 종일

창문을 벗어나지 못하는 섬

집이 없는 사내들이

모서리 한 켠씩을 차지해

저마다 낮은 어깨를 누인다

지붕 위에는 밤안개가

오래오래 머문다

 

 


 

 

최갑수 시인 / 밀물여인숙 3

 

 

창 밖을 보다 말고

여자는 가슴을 헤친다

섬처럼 튀어오른 상처들

젖꽃판 위로

쓰윽 빈 배가 지나고

그 여자,

한웅큼 알약을 털어넣는다

만져봐요 나를 버텨주고 있는 것들,

몽롱하게 여자는 말한다

네 몸을 빌려

한 계절 꽃 피다 갈 수 있을까

몸 가득 물을 길어올릴 수 있을까,

와르르 세간을 적시는

궂은 비가 내리고

때묻은 커튼 뒤

백일홍은 몸을 추스린다

 

그 여자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애처로운 등을 한 채

우리가 이곳에 왜 오는지를

비가 비를 몰고 다니는 자정 근처

섬 사이 섬 사이

두엇 갈매기는 날고

밀물여인숙

조용히 밀물이 들 때마다

 

 


 

 

최갑수 시인 / 밀물여인숙 4

 

 

목련이 진다

봄밤, 지는 목련을 바라보다

그 여자도 따라 진다

사랑에 헤프고

눈물에 헤프고

가르랑 가르랑

실없는 웃음에도 헤픈 그 여자

문패도 번지수도 없이 언제나 젓가락 장단으로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다는

그 여자

목련 때문이야,

꽃진 자리가 안타까워

짓무른 속눈썹을 떼어내는

손톱만한 그 여자

 

사랑이나 하자꾸나

맨몸으로 하면 되는 거

하고 나서 씁쓸하게 웃어버리면 되는

그런 거

어느새 달은 떠올라 고요히 창문을 엿보고

봄밤, 목련이 진다

두근두근

목련이 진다

 

 


 

최갑수 시인

1973년 경남 김해 출생.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7년 <문학동네> 하계문예공모에 <밀물여인숙1> 외 5편이 당성되어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 <단 한 번의 사랑>(2000년 문학동네). 여행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