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갑수 시인 / 지붕 위의 별
요즈음엔 지붕 위로 올라가는 날이 잦다 내가 누군가를 지나치게 그리워하고 또 그 그리움으로 인해 깨진 저 서녘 하늘처럼 가슴이 아프다는 말이 아니다 아직도 누군가를 못 잊어 못 잊어한다는 말이 아니다 지붕 위의 빛나는 별이여 어느 날 그대라고 불리웠던 내 가슴속 단단히 못박힌 이여 당신을 사랑했었단 말은 더더욱 아니다
별이 진다 이 밤 누군가 이별의 맑은 꿈을 꾸고 있는가 보다
최갑수 시인 / 밀물여인숙 2
바다가 밤을 밀며 성큼 뭍으로 손을 내밀고 아낙들이 서둘러 아이들을 부른다 겨울밤은 폐선의 흔들림을 감당하기에도 벅차고 내 잠을 밀고 촘촘히 올라오는 잡어떼 별처럼 삼십 촉 백열구가 떴다 아직도 잠들지 못한 걸까, 홑이불 속 사고 싶은 것이 많다는 그 여자도 따라 뒤척인다 뒤척인 자리마다 모래알들이 힘없이 구르고 곧 허물어질 것만 같은 등 나는 입술을 대고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러본다 그 여자의 등이 조금씩 지워진다 어느 땐가 내가 서 있었던 해변과 사랑하는 것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해보던 사납던 그 밤도 지워진다 여자의 등에 소슬하게 바람이 일고 만져줄까, 하얗게 거품을 무는 그녀의 얇은 허리와 하루 종일 창문을 벗어나지 못하는 섬 집이 없는 사내들이 모서리 한 켠씩을 차지해 저마다 낮은 어깨를 누인다 지붕 위에는 밤안개가 오래오래 머문다
최갑수 시인 / 밀물여인숙 3
창 밖을 보다 말고 여자는 가슴을 헤친다 섬처럼 튀어오른 상처들 젖꽃판 위로 쓰윽 빈 배가 지나고 그 여자, 한웅큼 알약을 털어넣는다 만져봐요 나를 버텨주고 있는 것들, 몽롱하게 여자는 말한다 네 몸을 빌려 한 계절 꽃 피다 갈 수 있을까 몸 가득 물을 길어올릴 수 있을까, 와르르 세간을 적시는 궂은 비가 내리고 때묻은 커튼 뒤 백일홍은 몸을 추스린다
그 여자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애처로운 등을 한 채 우리가 이곳에 왜 오는지를 비가 비를 몰고 다니는 자정 근처 섬 사이 섬 사이 두엇 갈매기는 날고 밀물여인숙 조용히 밀물이 들 때마다
최갑수 시인 / 밀물여인숙 4
목련이 진다 봄밤, 지는 목련을 바라보다 그 여자도 따라 진다 사랑에 헤프고 눈물에 헤프고 가르랑 가르랑 실없는 웃음에도 헤픈 그 여자 문패도 번지수도 없이 언제나 젓가락 장단으로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다는 그 여자 목련 때문이야, 꽃진 자리가 안타까워 짓무른 속눈썹을 떼어내는 손톱만한 그 여자
사랑이나 하자꾸나 맨몸으로 하면 되는 거 하고 나서 씁쓸하게 웃어버리면 되는 그런 거 어느새 달은 떠올라 고요히 창문을 엿보고 봄밤, 목련이 진다 두근두근 목련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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