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인 시인 / 안경을 바라보며
벗어놓은 안경은 골똘함이 직업 같다 거실에 놓였어도 광야를 내다보듯 은애(恩愛)의 훤칠한 시력을 불러보는 침묵 같네
인간을 벗었으니 누가 쓰면 마뜩한가 섬잣나무 등걸이나 고물이 된 자전거에 아니면 외눈박이 고양이 그대 한번 써볼 텐가
스러지는 향기한테 콧등 높여 씌워보면 주니가 든 시문(詩文)한테 훈김처럼 씌운다면 백리향 만리향이 번질까 송뢰(松籟)품은 애체(靉靆)여
유종인 시인 / 월척
올봄에는 무엇이나 이 눈물겨움이 월척일세
어미 몸을 먹고 자란 거미 새끼도 월척이고
우주의 모래알 같은
외사랑도 월척일세
유종인 시인 / 마음
하루는 눈물 글썽한 상거지가 다녀갔다
또 하루는 꽃도 없이 바위가 그늘졌다
오늘은 술이나 받게
죽통(竹桶)처럼
비었다
유종인 시인 / 답청(踏靑)
1 맨발로 밟고 가자 바람을 밟고 가자
피를 좀 흘려보자 초록을 좀 눌러보자
헌혈차 문을 밀고서 겨울 피를
봄에 주자
2 들판은 연둣빛 들판 돌아올 땐 초록 들판
외딴 것들 빈손에는 연애담이 풀물 들어
지구에 또 사랑이 걸린다 짙어가자 마음이여
3 비천한 듯 고고한 듯 가난한 듯 소슬한 듯
그러나 품고 넘자 거리의 소산일랑,
맨발로 달려가 맞자 천둥 치는 천기(天機)의 들
유종인 시인 /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인을 위한 파반느
백발의 저 노인은 백 년 전도 백발 같아 앞서 가 뒤돌아보니 자작나무 풍채인 게 거뭇한 옹이 마디에 웅숭깊은 눈을 떴네
공중의 어느 좌표에 화장실을 세워놓고 새들은 꼭 그 자리서 뒷일을 보는갑다 흰 새똥 뒤집어쓴 바위가 천년 가는 혼수(婚需)같네
잎새가 죽은 난과 새 촉이 돋는 난(蘭)은 한 바람에 다른 결로 햇빛 속을 갈마들며 터 잡은 고요의 심지에 수결(手決)하듯 꽃을 버네
남녘의 섬 한 귀퉁이 나를 번질 터가 있어 독필(禿筆)의 그 날까지 번민을 받자 하니 툇마루 볕 바른 자리에 선지(宣紙)펴는 댓잎 소리
야자수와 소나무가 쪽동백을 아우 삼듯 까마귀와 갈매기가 청보리밭 답청하듯 숨탄것 지상의 한 걸음씩 몸을 내는 얼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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