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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옥 시인 / 배회 외 5편 한창옥 시인 / 배회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의 눈빛이 자석처럼 빨려들게 한다 주파수를 잃은 무성음에 눈물이 고인다 오롯이 마음 준 사람을 내려놓지 못하고 돌아오지 않는 숱한 꿈을 기다리며 까맣게 타들어간 상처는 또 다른 욕망을 배회하다가 해안의 어깨를 빠져나오고 있다 해운대 바다의 모래알만큼이나 신열을 앓던 시간들이 차마 만질 수 없어 갈매기 따라 무리지어 날아오른다 가장 비릿하고 뻐근하게 다가서는 소리 없는 몸짓이 미련스럽지만 선혈을 쏟아내며 떠오르는 태양을 끌어안고 해돋이 마중에 뗏목처럼 밀려오는 무겁게 눌린 시간을 주섬주섬 털어버린다 한창옥 시인 / 팝콘 아가의 말문이 톡톡 터진다 엄마의 웃음이 팡팡 터진다 꽃이 피는 것은 나무만이 아니다 안방에서 마루에서 꽃망울 마구 터진다 가을햇살 품고 오는 바람.. 2023. 6. 1.
서영호 시인 / 사랑 외 2편 서영호 시인 / 사랑 얼마나 불러야 사랑을 알 수 있을까요 얼마나 알아야 사랑을 느껴볼 수 있을까 이제 알 때도 되었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다 사랑은 천국에서도 사랑 찾아 헤매지는 말아야지 미련 맞게 미운 사랑 고운 사랑 속도 겉도 알 수 없는 사랑이야 서영호 시인 / 어느 별 영원한 시냇가엔 눈이 내리겠지 이름 모를 나무 사이 江은 흐르겠지? 이 밤 내 불면의 창가에 반짝이는 반짝이다, 스러져간 그대 발자국… 서영호 시인 / 거대한 모순 사람이 할 말을 못 하고 사는 세상이 아니라 해야 될 말을 사람들은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말 사실 뜻은 그게 아닌데 저희끼리 둘이서 뭐라고 거짓, 농담할 때 옆에 가는 단벌 신사 자기한테 혹시 거지, 한 줄 아는 착각 오해 피해의식 잠재의식 되노라 날씬한.. 2023. 6. 1.
정낙추 시인 / 익모초 외 2편 정낙추 시인 / 익모초 ​ 구월 초아흐레 지나고 첫서리 오기 전 어머니는 흥주사*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절집 근처에서 익모초를 한 자루 뜯어 오셨다 볕 좋은 날 그늘에 말린 익모초 몸이 냉한 여자의 입술 같은 푸른 잎과 폐경이 가까운 여자의 마른 이슬 같은 자주색 꽃에서는 가슴이 타는 어머니의 쓴 냄새가 풍겼다 ​ 여자는 어미가 되어야 여자니라 뱃속에 들어선 생명은 애가 아니라 부모니라 ​ 오이꽃처럼 노랗게 뜬 얼굴로 친정에 들락거리던 누님은 그해 겨울 내내 금계랍보다 쓴 어머니를 먹고 여자가 되었다 ​ 여자의 여자가 또 어미가 된 세월 몸에선 온기도 냉기도 돌지 않고 달마다 피던 이슬의 기억도 희미해진 아주 오래 묵은 익모초 한 그루 가을볕 아래서 여전히 어미 노릇을 하고 있다 ​ *흥주사: 태안 백화.. 2023. 6. 1.
김광규 시인 / 밤눈 외 3편 김광규 시인 / 밤눈 겨울밤 노천 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온갖 부끄러움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김광규 시인 / 봄놀이 아스팔트 길에서 골목길로 다람쥐처럼 쪼르르 달려 들어간다 전봇대 옆길에서 한길로 고양이 새끼들처럼 후다닥 뛰어 나온다 조그만 자전거를 한 대씩 타고 자동차들 사이로 쏙쏙 누비고 다니며 아슬아슬하게 숨바꼭질 벌인다 마을버스를 급정거시키고 두부 장수 오토바이와 하마터면 정면충돌을 할 뻔한다 발갛게 얼굴이 상기된 꼬마들 온갖 걱정 아랑곳없이 어른들의 노곤한 발걸음 사이로 바람처럼 빠져나가는 개구쟁이들 그들은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뒤돌아보며 앞을 내다보며.. 2023. 6. 1.
임경림 시인 / 연한 새 잎 돋듯 외 2편 임경림 시인 / 연한 새 잎 돋듯 몇 달째 거동 없던 이층집 할머니 조그만 창문을 열고, 마당가에 빨래 널고 있는 나를 내다보며 혼잣말을 내뱉는다 -사람 소리 들응께 코에서 구신내가 난대이 살도 뼈도 없는 구신내를 씹는 양 빈 입을 오물거린다 푹 꺼진 눈두덩, 흘러내리는 광대뼈, 귀도 눈도 어두워진 할머니의 외로운 몸이 쫓고 있는 구신내 어려지고 어려진 한 짐승이 코를 킁킁거리며 찾아 헤매는 젖내 같은 살내 같은 구신내 살아도 너무 오래 살아 좋은 맛도 싫은 맛도 죽어버린 입 안에 연한 새잎 돋듯 침방울이 솟고 합죽하게 쭈그러진 입가에선 오월의 햇빛이 흰 거품을 게워내며 삭아내린다 임경림 시인 / 이번 생을 모르는 한 생이 그 해 봄, 우리는 불판에 삼겹살 구워 씹고 기름 냄새 번들거리는 입으로 지하 노.. 2023. 6. 1.
김종태 시인 / 피나물 외 2편 김종태 시인 / 피나물 티끌 하나 없이 고운 얼굴 손 까딱 건드리지 마세요 겉잡을수 없이 뚝 떨어진다오 선하니 널푸른 잎사귀 장난 삼아 뜯지 마세요 붉은 피 뚝뚝 떨어진다오 원색 빛깔 작은 몸 모진 꿈 제발 얕보지 마세요 오뉴월 서리 같은 독이 있다오 한 번 품은 마음 허틀어질까 무섭다 돌아서지 마세요 혼자만 눈물 뚝뚝뚝 흘린다오 김종태 시인 / 연서(戀書) 마지막 식사일 줄 모른다는 생각으로 생오이 고추장 찍어 꾸역꾸역 밥 말아 먹었습니다 마지막 하룻밤일 줄 모른다는 생각으로 보리차에 스틸녹스 씹으며 아득한 잠 청하였습니다 운 좋게 깨어난 아침이면 마지막 강의일 줄 모른다는 생각으로 목청껏 푸른 보드마커 잡았습니다 마지막 봉급일 줄 모른다는 생 각으로 우두커니 자동입출금기 앞에 서곤 하였습니다 마지막 .. 2023. 6. 1.
강영은 시인 / 쇠소깍, 남쪽 외 2편 강영은 시인 / 쇠소깍, 남쪽 소가 드러누운 것처럼 각이 뚜렷한 너를 바라보는 내 얼굴의 남쪽은 날마다 흔들린다 창을 열면 그리운 남쪽, 살청빛 물결을 건너는 것을 남쪽의 남쪽이라 부른다면 네 발목에 주저앉아 무서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무서움보다 깊은 색, 살이 녹아내린 남쪽은 건널 수 없다 눈이 내리면 너도 두 손을 가리고 울겠지 눈 내리는 날의 너를 생각하다가 북쪽도 남쪽도 아닌 가슴팍에 글썽이는 눈을 묻은 젊은 남자의 비애를 떠올린다 흑해의 지류 같은 여자를 건너는 것은 신분이 다른 북쪽의 일, 구실잣밤나무 발목 아래 고인 너는 따뜻해서 용천수가 솟아나온 너는 더 따뜻해서 비루한 아랫도리, 아랫도리로만 흐르는 물의 노래, 흘러간 노래로 반짝이는 물의 살결을 무어라 불러야 하나 아직도 검푸른 혈흔.. 2023. 6. 1.
안상학 시인 / 소풍 외 4편 안상학 시인 / 소풍 내사 두어 평 땅을 둘둘 말아 지게에 지고 간다 새들이 나무를 꼬깃꼬깃 접어 물고 따라나선다 벗은 이 정도면 됐지 술병을 닮은 위장 속에는 반나마 술이 찰랑이고 파이프를 닮은 허파에는 잎담배가 쟁여져 있으니 무슨 수로 달빛을 밟고 가는 이 길을 마다할 것인가 무슨 수로 햇빛을 밟고 가는 이 길을 저어할 것인가 해와 달이 서로의 빛으로 눈이 먼 이 길을 뒤뚱이며 간다 어느 날은 달의 뒤편에 자리를 펴고 앉아 지구 같은 것이나 생각하며 어느 날은 태양의 뒤편에 전을 펴고 누워 딸내미와 나같이나 불쌍한 어느 여인을 생각하며 조금씩 술을 비우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담배를 당긴다 그때마다 새들은 나무를 펴고 앉아 노래를 부르거나 모래주머니에 챙겨 온 콩 두어 개를 꺼내 먹는다 가끔 바람이 불.. 2023. 6. 1.
최윤정 시인 / 해변의 책 외 1편 최윤정 시인 / 해변의 책 책머리까지 닿을 듯 파도가 밀려온다 책머리에서 하얀 포말이 솟구친다 바다 이야기는 아니고 해변의 시인 것도 아니지만 한 줄의 문장이 얼룩져 몇 겹의 물살로 보글거리며 번진다 쓸려 간 글자마다 묻은 모래는 바위섬에 도착하자마자 물보라로 솟구쳐 물거품이 몰려다닌다 모래빛 끝없이 몰려다니는 물거품으로 굴러가는 것 끝없이 가벼워져 가벼운 자리로써 너라면 새의 부리 적시고 가는 글자는 이제 날개를 달고 해무 속을 움직인다 처음 글자였던 순간을 잊은 채 푸른 잉크 뚜껑 열린 채 쏟아진 바다 위에서 잠시 홀가분해져 송화 가루 묻은 모래 너머 그저 가벼운 자리로써 감감해질 나라면 계간 『아토포스』 2023년 창간호 발표 최윤정 시인 / 펀칭기 몇 줄의 빛을 가졌는지 터지기 전엔 가늠이 잘 안.. 2023. 6. 1.
김왕노 시인 / 나는 애월로 너는 이니프스리로 김왕노 시인 / 나는 애월로 너는 이니프스리로 ​ 너는 이니스프리로 가거라. 그곳에서 오두막집을 짓고 아홉이란 콩밭을 일구고 꿀벌 한 통을 키우든지 나는 애월로 가리라. 그곳의 오름에 움막 짓고 달집을 태우며 유채꽃 노란 날 말똥냄새 나는 진한 사랑으로 망아지를 낳는 한 쌍의 말을 기르리라. 너는 이니프스리의 아침에 풀밭에 이슬로 방울방울 맺히는 평화로운 날을 보내며 그간 메말랐던 네 문장에 물꼬를 트듯 푸른 하늘을 끌어들여도 좋고 나는 애월에서 누대로 이어온 할아버지 말씀에 따라 천군만마를 기르려고 날마다 말발굽을 갈고 마방에서 한라산에 별이 떨 때까지 일하리라. 이니프스리 한밤중은 온통 흐릿한 빛, 대낮은 보랏빛, 저녁은 홍방울새 날개로 가득하나 애월의 한밤중은 밤새의 붉은 울음, 대낮은 끝없이 펼쳐.. 2023. 6. 1.
박수현 시인 / 그 집 외 2편 박수현 시인 / 그 집 ​ ​ 그 집은 사철 겨울이었네 영지못을 메운 터에 자리한 국민주택 13호, 담쟁이넝쿨이 온몸을 뒤채며 벽마다 기어올랐다네 삐걱, 철대문을 밀었을 때 사월에도 꽃망울 틔우지 못한 목련 한 그루가 아는 체를 했네 테너가수 N선생과 치매든 모친, 집안일 하는 아주머니, 영 철들지 않을 표정의 딸이 사는 집에 나는 길고양이처럼 잠행 했다네 갓 스물, 입주 과외하던 내가 그 애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그 집은 더 어려운 문제를 내게 내주곤 했다네 그 앤 자주 가출했고, 할머니가 종일 단물을 빨다 뱉은 쥬시후레쉬민트 은박지로 새를 접어 날렸다네 그 애가 접었던 종이새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였을까 저들끼리 모가지를 감고 조르며 오르는 담쟁이넝쿨들의 밀어(密語)였을까 달빛이 푸른 속눈썹을 늘이는.. 2023. 5. 31.
손택수 시인 / 완전한 생 손택수 시인 / 완전한 생 완전히 행복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행복의 중심에 있을 때조차 어딘가는 조금씩 불편했다 완전히 불행했던 적도 없는 것 같다 불행의 중심에 있을 때조차 대책 없는 낙관이 있었으니 완전히 진실했던 적은 있었나 진실의 중심에 있을 때조차 얼마간은 나를 의심하는 병을 내려놓질 못했다 완전히 진실하지 않았던 적도 없는 것 같다 위선의 중심에 있을 때조차 몸은 알고 수면장애에 시달렸으니 완전히 사랑했던 적도 없는 것 같다 결혼행진곡 속에 있을 때도 나는 어딘가로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사랑하지 않은 적이 있었나 불을 끄지 않고 기다리는 아파트 벼랑 위의 불빛이 나의 등대였으니 죽을 때는 완전히 죽을 수 있다면, 깨끗한 재가 되어 타오를 수 있다면 그러나 눈을 감는 그 심.. 2023. 5.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