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48566 채종국시인 / 간절기 채종국 시인 / 간절기 헨델의 아리아를 듣는 아침 봄눈처럼 어색한 말을 하는 아침 마스크를 벗고 가지에 싹 튼 권태를 읽는다 권태라는 것은 봄이 올 수도 있다는 말의 또 다른 텍스트 나른한 온기에 꼬리를 감춘 고양이처럼 담장 너머 숨어버린 검은 모습의 겨울 애상을 찾는다 네모 난 새의 울음 눈 속에 갇히고 허공에 걸려있는 부음 같은 햇살 몇 줄 저를 구원하라며 봄을 기다리는 가녀린 나무의 간절한 손처럼 봄은 곧 부르짖는 자의 응답이라 하지만 바람 한 점 없는 겨울 아침 시퍼런 하늘은 그러한 간절도 모르는 채 나무의 마른 기도를 태우는 중이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2월호 발표 채종국시인 1970년 광주에서 출생. 2019년《시와 경계》를 통해 등단. 2016년 신라문학대상 수상(시조.. 2023. 4. 2. 이종섶 시인 / 눈물 외 2편 이종섶 시인 / 눈물 어린 연어가 먼 바다로 떠나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물짓는 어미, 그 물이 1급수인 것은 어미가 흘린 눈물 때문이다 새끼들이 동해를 지나 태평양을 건너 알래스카까지 갔다가 목숨을 걸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은 어미의 눈물이 그리워서다 ㅡ 『시인시대』(2022, 여름호) 이종섶 시인 / 늦둥이 주먹만 한 녀석들을 주렁주렁 땅속에서 키우던 감자가 힘이 부쳤는지 오래전에 수명을 다하고 말았는데 허공에 칸칸이 마련해준 방마다 튼실한 씨알들을 기르던 옥수수도 일찍 기운이 딸렸는지 벌써부터 수염이 늘어지면서 조로하다가 무더위 끝에 세상을 뜰 수밖에 없었는데 무성하게 자라던 텃밭의 작물들 모두 여름이 지나자마자 성장을 멈추고 급히 노쇠해버렸는데 얼기설기 힘 좋은 호박은 아직도 입가에.. 2023. 4. 2. 김이응 시인 / 즐거운 고려장 김이응 시인 / 즐거운 고려장 여보, 잉카 사람들처럼 바랑에 방울 달고 바람을 돌고 돌아 산굽이 오르내리다 보면 두 사람 누워 네 다리 뻗을 조그마한 땅뙈기 만나지 않겠어요 우리 외할머니의 시어머님은 아드님이 울며 지게 매고 산으로 데려 가셨대요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대요 어제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육십갑자 한 바퀴를 완주한 날, 당신과 난 먼 생을 걸어가야 돼요 아무도 뒤쫓아 오지 못하는 높은 곳으로 천지사방 쏘다니다 지치면 부둥켜안고 잠들자고요 두 몸뚱이 포개진 채로 천만년 풍화되어 바람으로 살아지더라도 우리 둘만 알아볼 수 있도록 껍데긴 여기 버려두고 알맹이로 떠나자고요 여보, 고대 잉카 사람들은 아이들을 낳고 기른 지붕 아래 두 개의 시간을 매달아두고 시계바늘이 포개지는 첫날 새벽길을 .. 2023. 4. 2. 김이듬 시인 / 결별 외 1편 김이듬 시인 / 결별 흘러가야 강이다 느리게 때로 빠르고 격렬하게 그렇게 이별해야 강물이다 멀찍이 한 떨기 각시 원추리와 반들거리는 갯돌들과 흰 새들과 착한 어부와 몸을 씻으며 신성을 비는 사람들과 돌아선 발이 뻘밭인 듯 발이 떨어지지 않아도 우리들 할 말이야 저 강물 같아도 너는 강물에 발을 담그고 난 손을 모아 그 물을 마신다 흘러가니까 괜찮은 일이다 우리는 취향이 다른 음악처럼 마주 보고 흐르거나 다른 지류로 알 수 없는 유형으로 흘러갈지 모른다 흐르고 흘러 너와 내가 우연히 다시 만난다면 그래서 오늘의 모습을 까마득히 잊고 반갑게 서로 포옹할지도 모른다 김이듬 시인 / 몽유도원 불 꺼진 방이 편하다 혼자 먹는 저녁과 말 붙이지 않는 이웃들 텅 빈 우체통 오지 않는 전화에 아무 느낌이 없다 여기 오.. 2023. 4. 2. 이태관 시인 / 단풍나무 외 3편 이태관 시인 / 단풍나무 모두들 한잔 걸쳤을 거다 자정이 가까워오는 시간 전화벨이 울리면 보나마나 선호다 ㅡ형, 근데 말이지 빙빙돈다 바람이 살며시 몸을 흔들면 떠날 차례야 이륙하는 프로펠러 씨앗들 멀리 가야 안전하다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낯선 도시의 바람은 차다 ㅡ형, 근데 말이지 이곳이 아닌가봐 ㅡ혀엉, 근데 말이지 여기가 어디야? 수화기 너머로 찬바람이 든다 선호야, 문 좀 닫아라 층계를 지날 때마다 붉은 센서등 켜졌다, 꺼진다 병원 앞, 단풍나무 날아간다 단풍나무 자정이 지난 시간, 전화벨이 울린다 -행님요, 그런데 말이죠 이태관 시인 / 김지미와 태현실, 엄앵란을 이야기하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룬다 그들의 노래는 각기 다르고 사연도 많다 오리나무는 오리伍里마다 심.. 2023. 4. 2.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211. 복음과 사회교리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세상의 빛] 211. 복음과 사회교리 (「간추린 사회교리」 150항) 공동체 경시 풍조부터 바로잡아야 가톨릭신문 2023-04-02 [제3337호, 18면] 사교육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지만, 과도한 사교육은 신앙교육, 가족·친척과의 만남까지 사라지게 만든다. 바로 공동체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용혜인: 돈을 써봤자 효과가 없다는 것은 ‘청년들이 애를 안 낳는다’는 말처럼 청년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진형: 저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애들을 좀 안 낳아 줘야, 제 생각에 5년에서 10년 정도 안 낳아 줘야 저희 세대들이 정신을 차릴 겁니다.(3월 14일 MBC 100분 토론 ‘출산율 0.78의 공포’) ■ 발등에 떨어진 불 .. 2023. 4. 2. 유희봉 시인 / 해바라기 외 2편 유희봉 시인 / 해바라기 새벽 아침 동쪽에서 솟아나 한낮 하늘 위쪽을 쳐다보며 저녁 무렵 서편으로 기우는 해를 따라 한길로 생활하던 해바라기 씨앗 같은 사람 한 송이 꽃을 피울 수 없어 일편단심 까맣게 타오를 때 더위를 극복하는 끈기로 커다란 해 시계를 매단 채 꼿꼿이 서있는 해님의 꽃처럼 가슴으로 정을 주고받으며 의지를 불태우던 의리의 사람 모두가 바람 부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애를 타지만 그대만은 하나의 뜻을 세우고 어두운 세상 불 밝히고 있다 유희봉 시인 / 귤나무 한라산 중산 간 외딴 마을 이름 없는 풀꽃 송이처럼 쉬어도 못 넘는 힘든 길을 지나 새싹을 틔우다 꽃을 피우며 먼바다 풍랑에 부서진 배 불길한 소식 걱정이라지만 작은 꿈을 키우는 귤나무같이 묵묵히 자기 터전을 지키고 행복의 닻을 내리.. 2023. 4. 2. 김지헌 시인 / 백두산 천지 외 1편 김지헌 시인 / 백두산 천지 장엄 벼랑을 오른다 고구려의 혼이 서리고 여진. 거란. 말갈이 신단수로 섬기며 봉화 올리던 민족의 시원 불의 가슴으로 물을 품은 채 장군봉. 천문봉. 용문봉 봉우리 봉우리 아득히 먼 옛날부터 초원을 내달려온 근육질의 백두 봉우리들 큰 바람이 산맥을 한번 휘돌더니 남녘으로 휘장을 친다 어여 오너라 가슴 열어 젖 물리는 어미처럼 메마른 대지를 적시며 압록과 두만으로 뿌리 뻗고 있구나 숨을 골고루 나누고 있었구나 사스레나무 수 만 년 쓰러질듯 어깨동무하며 이 땅 지켜왔구나 두메자운. 담자리꽃. 금매화. 하늘매발톱 가장 낮은 자리에서 아라리 아라리요 뿌리 내리고 있었구나 신의 눈동자 천지로부터 태초의 두루마리에 이 땅의 이야기들을 받아 적고 있었구나 하늘이 땅이 인간이 모두 하나 되.. 2023. 4. 2. 김지희 시인 / 책 외 2편 김지희 시인 / 책 노을이 여자를 읽고 있는 저녁 어스름 언제부터 그 여자 도서관에 꽂혀 있었는지 몰라 세상 어디쯤에 꽂아 둔지도 언제 끼워 둔지도 몰라 세상, 성게처럼 헤매던 한 여자 몇 페이지 넘기지도 못했는데 아무도 그 여자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적 없고 자신조차 다 읽어내지도 못했는데 폐관 시간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네 - 시집, (시와문화, 2015) 김지희 시인 / 봄날에 격투하다 추운 봄날 인사동에 있는 음식점 ‘여자만’ 앞에서 나를 만났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람의 묘비란 찻집 지나 혼자서 어둠을 먹는 여자 지나 갇혀 있던 새장 속의 새 지나도록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하는 당신 시간을 뚫고 나가는 길 한 무더기 꽃과 같은 불빛은 찬란하기만 한데 나는 당신의 가슴께를 맥없이 부딪친다 심장의 뼈에.. 2023. 4. 2. 류인채 시인 / 대들보 류인채 시인 / 대들보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온갖 풍상을 함께 한 낡은 집 한 채 구십 년째 버티고 있는 대들보가 무너져 칡넝쿨에 덮일 것만 같아요 허리협착증과 무릎 관절염과 근육파열로 엉덩이와 다리에 바위를 매단 것 같아 열 번 스무 번 마른 몸을 비틀다가 겨우 일어나는 어머니 팔에도 쇳덩이를 얹은 것 같아 일상이 고통입니다 자식 여섯 먹여 살린 젖가슴은 배꼽까지 늘어졌고 짓무른 눈빛 창문 밖 자동차 경적이 무시로 울고 가네요 비로소 일손을 놓고 발끝을 세우고 누운 어머니 명절 지나 북적대던 자손들 떠나니 집안 가득 고인 소리 간절히 듣네 층간 소음마저 다정합니다 나는 하릴없이 구부러진 지렛대 하나 들고 이리저리 서성일뿐입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2월호 발표 류인채 시.. 2023. 4. 2. 허혜정 시인 / 분해자들 외 1편 허혜정 시인 / 분해자들 폐차 들어오지 않는 마당은 을씨년스럽기도 하지만 낡은 세무잠바를 걸친 사내 하나 고철이 된 차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녹슨 쇠철문이 열리고, 제철공장 같은 도시에서 끝없이 자동차가 쏟아져나올 때도 하나하나 잘라낸 문짝들을 쌓아놓고 싸구려 중고차 부품을 뜯어내는 손길이 있었다. 바람에 침울하게 덜컹이는 강철 문짝 곁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이토록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들과 허망한 폐허로 내모는 소리 없는 위협들 브레이크등이 깨진 채 폭주하는 타이탄 트럭처럼 고통마저 짓밟고 간 무감각한 질주를 모두가 속도의 출혈을 꿈꾸고 있다 조수석에 아무렇게나 펼쳐진 무거운 지도책과 메마른 두개골을 쳐들던 일몰의 헤드라이트 때로 트렁크째 벌어져 산산이 튀어오르고픈 도로에서 아무도 책임지지 못할 격돌의 분.. 2023. 4. 2. 강에리 시인 / 백두산 외 1편 강에리 시인 / 백두산 비단에 수놓은 듯 오색꽃 경연하는 곳 태고적 신비 가득한 천지 파란 눈으로 하늘 바라보고 있지 하라버지의 하라버지 때부터 지켜오던 신성한 백두산 오늘은 나그네 되어 오르네 천지가 울면 비가 온다는데 주인 바뀐 그 땅은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많아 순례자의 접근을 거부하네 천지가 운 다음날은 마법처럼 찰나의 햇살에도 꽃은 피지 안개 속에서 때를 기다린 꽃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켜고 꽃망울을 터트리지 강에리 시인 / 떨켜 긴밤을 뽀갠 것은 이별이 아니라네 푸른 들 새겨놓고 강물과 춤도 추고 시간을 통통히 벗겨 그대 둥둥 떠 오네 못다한 언어들이 소리로 한창인데 열기를 털어내며 산천이 불타네요 뜨겁게 빨간 편지를 맑게 피워 가네요 팽팽한 서러움에 충혈된 단풍이라 영혼의 물관으로 깊게도 흔.. 2023. 4. 2. 이전 1 2 3 4 ··· 404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