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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13411

조재형 시인 / 파양 외 1편 조재형 시인 / 파양 그가 우리 가문에 입적된 시기는아내의 사십주년 생일 무렵 일게다.그의 입양으로 집안은 바람 잘 날 없다.피 한 방울 섞지 않은 그에게 애정 행각이 넘친다.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울음보아내는 달려가 어르고 달래고 소곤소곤 거린다.외출할 때도 그녀를 늘 따라 붙는 찰거머리,조촐한 살림에 양육비가 만만치 않다.자동이체 출금 내력으로 부부싸음이 잦아졌다.아내의 편애로 가족 간 대화는 끊긴지 오래남은 가솔들의 상처가 깊어 간다.아무래도 결단을 내릴 때가 이르렀다.꺼져 가는 화목 보일러를 재가동하기 위해관할 대리점에 해지 신청을 해야겠다.,,스마트폰 너 이놈! 조재형 시인 / 하루의 사용법 슬픔은 수령하되 눈물은 남용 말 것주머니가 가벼우면 미소를 얹어 줄 것지갑을 쫓지도 쫓기지도 말고안전거리.. 2022. 12. 9.
김명기 시인(속초) / 등이 가렵다 김명기 시인(속초) / 등이 가렵다 버림과 비어 있음의 경계선은 어디쯤일까 요즘은 자꾸 등이 가렵다뒤꿈치 치켜들고 몸을 비틀며어깨 너머 허리 너머 아무리 손을 뻗어뒤틀린 생각만 가려움에 묻어 손끝에 돋아난다 나와 내 몸 사이에도이렇듯 한 치 아득한 장벽이 있다는 것이두렵고 신비스럽다 빛과 어둠, 혹은사람과 사람 사이 정수리 어디쯤죽음에 이르러야 열리는 문이 외롭게 버티고 있는 것 같고때론 소슬바람에도 쉬 무너질 것 같은 그 무엇이내 안 어딘가 덜컹거리고 있다. 등이 가려울 때마다등줄기 너머 보이지 않는 길들이 그립다 -시집 김명기 시인(속초)강원도 속초에서 출생. 1991년 《문학과지역》 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등이 가렵다』가 있음. 1992년 『문학세계』 신인상. 현재 〈빈터〉 동인으로 .. 2022. 12. 9.
정현우 시인 / 빙점 외 1편 -제4회 동주문학상 수상작정현우 시인 / 빙점 나의 아홉 살은 얼음감옥,쌀은 씻어도 묵은 냄새만 났다. 엄마, 사람에게도 겨울잠이 있으면 좋겠어요.사람이 어는점을 알고 싶어요,지루한 속도는 언제 떨어질까. 동그란 원을 그리듯 앉아사람들의 머리냄새가,삶이,나를 지나칠 테니세상의 경계가 희미해져요.* 어둠이 얼리면 발목은 없어진다.나는 신을 뒤집어 신고다정히 젖을 수 있다. 겨울이 울음을 걸어 잠근다.수도꼭지는 돌아가지 않고,처음부터 받아 놓은 것은얼음, 나의 잘못, 고드름 속,거꾸로 달린 천사들이 기어 나와나의 발목을 깨트리는 밤. 별점을 치는 뱀들을눌러 죽이는 밤. 점으로 떠돌다가온전한 사람으로 점지되었을 때, 시간에 연명하는 넝쿨 같은 인간에게천사들이언 손에 입김을 불어 줄 때 슬픔은 바람이 불어오는 .. 2022. 12. 9.
김휼 시인 / 퇴행성 슬픔 김휼 시인 / 퇴행성 슬픔 바람이 멈추면 내 슬픔은 구체적이 됩니다 봄 흙에 젖살이 내릴 즈음 연둣빛 말문을 텄지요 태생이 곰살맞아 무성한 소문을 달고 살았어요 잘 여문 눈빛으로 성장기는 푸르게 빛났습니다 귀가 깊어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일을 도맡았습니다 여름이 다 지나던 어느 날, 번쩍, 순간을 긋고 가는 일성에 난청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만나야 할 사람만 만나며 살았습니다 해야 할 일만 하고, 가야 할 곳만 갔습니다 말할 수 없는 일에는 침묵하며 지냈습니다 참는 게 버릇이 되어버린 직립은 퇴행성 슬픔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구부러지지 않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야 했으며 뼈마디에서는 바람 소리가 들렸습니다 손가락 뼈들이 뒤틀리고 있지만 경탄을 잃지 않으려 식물성 웃음만 섭취해 보는데 오백 년이라는 치.. 2022. 12. 9.
김은옥 시인 / 지구 외 2편 김은옥 시인 / 지구 손바닥에 지구를 올려놓고 보는 세상이야여기에 안과 밖의 구별이 있을까파랑은 바다고 오색찬란한 무늬는 육지라고그렇다고 지구를 함부로 굴려서 망가뜨리지는 마고통의 뿌리는 뼈를 뚫고 골수에까지 뻗어갈 거라고 김은옥 시인 / 사철나무가 흔들린다 한 생애가 살갗을 스친다사철나무 하나 흔들흔들다른 나무는 조금 흔들멀리 있는 나무는 살짝 흔들흔들리지 않는 나무들도 있다빽빽이 들어선 나무들 사이에도바람의 마음이 통하는 것과 통하지 않는 것이 있는 걸까사람과 사람 사이에도바람의 생애를 읽는 사람과 읽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바람이 오시리라는 기대에미리부터 움찔 떠는 놈도 있다돌멩이가 날아온다큰 걸음으로 피하고 바라보니 날아가는 참새였다참새에 맞아 죽을 수도 있을까참새는 미래를 모르고나 또한 돌멩.. 2022. 12. 9.
김수우 시인 / 모과 외 1편 김수우 시인 / 모과 소명이다 충분히 썩어가는 것최선으로 향기롭다가 최선으로 깜깜해지는 모과 속에서 신이 썩어간다그 신은 아브라함이 초대한 사막나그네 중 한 사람 하루 걸러 한 번 허공의 무게를 측량하던추락으로 목숨을 증명하던검붉은 반점 위로 곰팡이를 피우는오래 전에 꿈꾸었던 배반을 완성하는 모과의 뼈는 향기였다삼켰던 구름송이와 천둥과 가을별자리를 게워낸다행운이라면 창가에서 태종대 앞 주전자섬을 바라보는 일물노을에서 지리산 산골을 건져내는 일 이유가 없는 것들이 살던 성전은 암흑이 되어 쪼그라든다향기는 오래된 쐐기중력을 쪼개고 쪼개고 쪼개어먼지의 한 미립자가 마침내 하나의 우주로 변환하면 울툭불툭한 이치들은 빙하조각이 된다녹고 녹고 바다를 떠돌다 흰 물거품이 되었던 신은충분히 썩어가는 일이 생의 전부임을.. 2022. 1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