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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14021

김효연 시인 / 꿈꾸는 문신 외 1편 김효연 시인 / 꿈꾸는 문신 일찍 담배를 나눠 빨며 주먹부터 키운 그 녀석 한자도 기타도 아닌 용 한 마리 속성으로 새겼는데 불법 시술인지 사용 부족 탓인지 목덜미 집어넣고 꼬리 숨기고 다니는 꼬락서니 조폭 아니면 양아치라도 되어야지 어린 딸과 눈 멀어가는 조모 곁에서 치매 노인에게 멱살 잡혀가며 두 손 포개는 용의 계보를 생각한다며 그럴 수 없어 속옷을 뒤져서라도 꼬투리 털어보려는 이웃의 호기심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더욱 매연 뿜는 트럭에 만물 싣고 담벼락에 전 펴는 잡동사니 그 속엔 투박스런 식칼부터 과도, 연필 깎는 칼까지 검지로 칼날의 먼지를 스윽 닦아보는데 권태롭던 시간이 꿈틀, 냄비를 고르던 여자가 움찔, 앉은뱅이 거울이 집요하게 사내의 티셔츠 앞 단추를 풀려고 덤비는 언젠가 날아오를 그날 지금.. 2023. 2. 6.
구연배 시인 / 새벽길 외 1편 구연배 시인 / 새벽길 누가 바람 속에 바람으로 불어와 순결한 풀빛이 되고 꽃 속에 꽃으로 다가와 투명한 향기가 되는지 눈뜨는 아침보다 먼저 깨어나 숲으로 가는 새벽길을 걸어보면 안다. 누가 씨앗 속에 씨앗으로 떨어져 뜨거운 뿌리가 되고 흙 속에 흙으로 부서져 고요한 땅울림이 되는지 새벽 강물보다 먼저 일어나 나를 흘러간 우물을 들여다보면 안다. 아, 침묵보다 더 고요한 말씀으로 묵은 귀를 씻는 내 비밀한 당신. 구연배 시인 / 훈계 가볍게 드나들 것. 소박하지만 난 늘 실패다. 집으로 돌아올 땐 주머니 가득 구겨진 지폐와 온기 없이 나눈 차가운 악수 그리고 한 없이 얇은 희망 부스러기들뿐 깔끔하게 오늘 하루와 결별하는 데 실패했다. 주머니가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다. 종잇장처럼 가볍게 나를 내려놓고 싶.. 2023. 2. 6.
이인서 시인 / 말이 달아났다 이인서 시인 / 말이 달아났다 돌아갈 수 없다면 그곳이 낙원인지 모른다 고물상에 끌려와 리어카에 묶여 있던 말들, 소리와 형상은 달아나고 달아나지 못한 기억들만 녹슨 스프링 위를 달리고 있다 스피커 소리가 골목을 가득 채우면 집집마다 치맛자락을 끌고 나오던 어린 눈동자들, 저마다 리어카 위 말에 올라탈 순서를 기다리곤 했지 어깨를 들썩이며 말을 타고 달리던 미국 영국 프랑스는 아직도 멀었는데 노래는 너무 짧아 달려도 늘 제자리이던, 따각따각 말발굽 소리도 없이 나는 떠나왔구나 말들은 제 등에서 달리던 아이들의 무게와 함박웃음과 혹은 도달할 수 없는 지명을 기억하고 있을까 어느새 말들은 달아나고 말 위의 시간들을 타고 너무 멀리 달려왔다는 생각 녹슬어가는 기억들이 건초처럼 쌓여있는 마구간, 고삐도 없이 빈.. 2023. 2. 6.
김유미 시인 / 새의 감정 외 1편 김유미 시인 / 새의 감정 할머니와 둘이 사는 것은 슬펐다 내 속에 누군가 버린 새가 살고 있다 숨을 쉬기 위해 영화관엘 갔고 가칭 투명이라고 했고 그날의 새는 불투명해서 날아가 버렸다 사람들은 모르는 눈치였지만 팝콘을 주고받은 아르바이트 언니는 눈동자가 그렇게 우울해도 되겠어? 라며 흰 구름을 권유했다 영화를 뒤집어 새를 불러냈다 허공의 줄거리에 초점을 맞추고 다시 얻은 새에게 흰 구름을 떠먹이는데 노랗게 물들인 내 머리카락이 자랐다 주머니 속 내 영혼을 만지작거리면 캐러멜처럼 끈적이는 손바닥 할머니 곁에서 꿈이라고 애교 떨고 화분 곁에서 예쁘지 예쁘지 속삭이다가 내 곁에서 거품이라고 풀이 죽기도 했다 벼랑을 다른 이름으로 바꾼다면 굳어 버린 날개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할머니 안 들리는 척 창밖으로 새.. 2023. 2. 6.
정화진 시인 / 징거미 더듬이 외 1편 정화진 시인 / 징거미 더듬이 조심스레 계단을 오르는 나를 붙드는 소리 계단 입구 놀이터 쇠 그넷줄이 밤바람에 찍찍거린다 삽시간, 5층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듯한 물소리 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나는 듣는다 계단에 물이 넘쳐 흐른다 낙동강 상류가 열리며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징거미들 병정놀이를 하던 시냇가 모래밭 발가벗은 햇살의 모래둔덕에 부러진 나무칼이 버려져있다 천천히 칼 속에서 할머니가 걸어나온다 된장 뚝배기를 들고 뚝배기 속 끓는 흰 고무신 한 짝이 보인다 모래밭에 얼핏 뒹구는 것이 있다 무엇일까 생각하던 나는 자라를 뒤따라 냇가로 가는 흰 고무신을 본다 모래밭 저편에선 또 누가 오고 있다 단발머리의 아이가 온다 폐렴 말기의 허파를 떼어 들고 겨우겨우 온다 기암바위 그늘에서 문드러진 손가락의 얼굴 없는.. 2023. 2. 6.
이복규 시인 / 유월流月 외 1편 이복규 시인 / 유월流月 하늘을 보며 그늘을 만진다 당신이 멀리 있어 그리움이 흐른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 그늘 아래 묻어 두고 유월을 걷습니다 푸른 잎들이 만들어 놓은 그리움의 핏줄 당신에게 흘러 갑니다 당신 만나고 돌아오는 바람에게 손을 뻗어 봅니다 아무도 모르게 미소 짓는 유월 이복규 시인 / 백제는 쓸쓸하다 하루 종일 컴퓨터 바둑이 유일한 낙인 여든이 넘으신 장인 여든이 넘었다는 말에는 언제나 죽음의 냄새가 난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 처음 들어갔던 백제 무녕왕릉은 죽음의 무섭고도 화려한 빛이 가슴을 찔렀다 부여가 고향인 장인어른의 바둑판에는 언제나 마지막일지 모르는 사석이 누워있다 폐렴이 스치고 간 장인의 깊은 기침소리는 백제의 쓸쓸함이 담겨 있다 장인의 눈빛에는 인생의 무의미함이 언제나 있었지.. 2023. 2. 6.
이관묵 시인 / 구절초 앞에서는 외 1편 이관묵 시인 / 구절초 앞에서는 구절초 피었다고 구절초 피었다고 금산錦山이 둥글게 부풀어 오르더군 구절초 앞에 널찍한 오후 펼쳐놓고 둘러앉은 골안개 자욱한 일교차들 정문正門없는 안색들 마음이 마음을 건드려 빛을 발하듯 구절초 앞에서는 구절초 앞에서는 왜 이별을 만든 이유가 말해지는지 왜 모든 얼굴들이 이해되는지 왜 사람이 초기화되는지 최적화되는지 마음 줄줄 엎질러진 얼룩 같은 꽃 혹은 그 후문後門 같은 꽃 이관묵 시인 / 저녁 강 강가에 무릎 세우고 앉아 흘러가는 강물 무연히 바라본다 사는 일이 모두 흐름에 물들다 가는 일이라고 한 여울이 다른 여울을 세차게 껴안는다 흐름의 수심 깊이 가라앉은 무겁고 느린 生이 있지 다 왔다, 다 왔다 할머니 목소리를 내는 그리움으로 읽히기도 하고 쓸쓸함으로도 읽히는 세.. 2023. 2. 5.
문현미 시인 / 아무런 날 외 1편 문현미 시인 / 아무런 날 새가 창문에 똥을 찍ㅡ 싸고 날아가고 어디선가 청바람이 설렁설렁 불어오고 햇빛, 그 환한 길 따라 꽃물결이 일렁이고 누군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눈부신 포옹을 하고 나는 화장실에서 먼 훗날을 경쾌한 속도로 스케치하고 하루치 입속의 행복이 노을빛 완경으로 익어가고 저녁에는 눈꺼플이 쉬이 나른해지는 아이처럼 두 손 꼬옥 붙들고 꿈나라에 들고 그렇게 아무런 일도 없이, 얼룩도 없이 문현미 시인 / 봄소식 바닥이 환히 드러나 보이는 호수에 물닭 몇 마리 유유히 물길을 내고 있다 날개 밑이 슬그머니 부풀어 올라 물 낯바닥이 자꾸만 간지럽다 참 파릇한 봄날 아침에 물안개 피어오르는 편지 한 통 문현미 시인 1957년 부산 출생. 부산대 국어교육과 졸업. 독일 아헨대학교(RWTH) 문학박사 .. 2023. 2. 5.
김가령 시인 / 부재의 형태 외 1편 김가령 시인 / 부재의 형태 ​ ​ 사다리를 오른다 태양의 맥박 소리를 들으며 너에게 간다 ​ 밖을 생각했다는 사실이 사실이 아니기를 상상하며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우리가 사다리라 불렀던 것들은 목적이 서로 다르다 넘어질 것 같지 않은 기둥의 태도가, 나이테 안의 깊이가, 품고 있던 무게가 서로 다르다 ​ 사다리에 대한 입장과 밖의 순서가 뒤섞일 때 무릎 아래로 접혀 있는 주름들, 삐걱대던 소리들 그것은 사다리의 통로이자 존재이다 ​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간 시간과 사람들 사이로 돌아오는 시간들이 교차한다 사다리의 안쪽과 사다리의 바깥이 충돌하고 있다 ​ 손을 탁, 탁, 털고 사다리를 세운다 바깥이 깊어진다 수평이 사다리를 버리고 수직으로 돌아선다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먼 하늘로 흐르는 것을 본다 ​ 사.. 2023. 2. 5.
윤향기 시인 / 불이不二(non-duality) 외 1편 윤향기 시인 / 불이不二(non-duality) 갓 지은 따끈한 밥을 푸고 날김 몇 장과 조기 한 마리 들고 마당 탁자에 앉았다 햇살과 인사하느라 잠시 한눈파는 사이에 김은 바람에 업혀 날아가고 조기는 고양이가 낼름했다 그래 바람은 바람 역할에 충실했고 고양이는 조기 냄새 마다하면 진짜 고양이가 아니지 나는 간장에 밥 비벼 맛있게 먹었다 윤향기 시인 / 엄나무 명상법 가시나무 아래 참깨 알갱이같이 아주 조용하게 앉아봐 숨쉬기와 성격은 하나야 태양이 그 빛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절대 순수에 홀로 서 보고 싶다면 시인의 이름을 아침마다 반복해 부르는 거야 그 소리와 음절에 깃든 신성이 너의 마음을 지나가는 순간, 너는 시를 느끼고 너는 한 편의 시로 태어나 너를 비추면서 함께 세상을 비출 거야 깊은.. 2023. 2. 5.
최희강 시인 / 인연 외 1편 최희강 시인 / 인연 겨울을 이겨내 지금 코를 만지네 밤은 푸르네 그녀는 예뻤다 이팝나무의 사랑꽃이 피우도록 하얀 밤에 혼자서 물을 마시네 남자는 바하리야 오아시스 주변의 백사막에 있네 누군가 피워놓은 화톳불에 어지러운 마음을 내려놓고 사막의 밤에 바다가 솟구쳐 형성된 지형은 새가 되어 떠날 채비를 하네 남자는 강하네 사막 가운데 조용히 자신의 입술을 축이네 어느 시인이 사랑한 이름 어느 시인이 기억한 이름 기다리면 될까요 어떻게 만나는지요 오직 당신만이 나의 입술에 키스를 하네요 하얀 석고 조각으로 누워 있는 강이라는 이름 사랑을 내려놓고 사랑을 마주하네 하얀밥 가득 입에 넣고 사랑은 가만히 있어도 내게로 오는 바람 불어라 낙타가 걷는 동안 당신의 눈동자는 살아있네 그 입술을 사랑하네 겨울을 이겨내 지.. 2023. 2. 5.
이선희 시인 / 웅덩이 외 4편 이선희 시인 / 웅덩이 길에도 상처가 있네 세상 발길질 혼자 감당한 듯 움푹 파였네 고름이 고여있네 손바닥만 한 그곳에 거침없이 빛 들어가네 상처가 끓네 딱지로 남은 꽃 이파리, 나무 삭정이, 날벌레 길이 가렵겠네 이선희 시인 / 보리수 새벽이었다 눈 떴을 때,윗목 벽에 개댄 아버지 담배 연기 넘어 너 죽고 나 죽으면 될 일이여 병든 아버지,저 어린애들 어떡해 엄마와 큰언니의 몸부림이 엉켜있었다 작은 언니와 오빠는 이불속으로 기어들었고 뒤뜰에서는 낮 동안 까치가 쪼다 간 보리수가 떨어지는지,툭 툭 잦은 소리 들렸다 많이 먹지 말라고엄마가 이르던 큰언니 입술만큼이나 고운 열매 오줌 누려는 듯 슬며시 빠져나온 나는 유난히 시고 떫은 설익은 보리수를 목이따끔거릴 때까지 따 먹었다 큰언니는 카페 여급이었다 우리.. 2023. 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