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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14021

한소운 시인 / 가면극 외 1편 한소운 시인 / 가면극 전 세계의 무대로 가면극이 펼쳐져요 벗는 배역은 no 눈만 보여주면 돼요 포옹도 no 목소리로 인식하죠 최대한 거리를 두는 것과 가면을 잊어서는 안돼요 가면이 없으면 무대에 나갈 수가 없어요 오늘 제 역할은 우체국 택배발송 앞에선 할아버지가 저울대 위에 박스를 올려놓자 직원이 보내실 물품이 뭐냐고 했죠 할아버지는 가면을 벗고,닭발모가지와 입마개라 했죠 직원이 가면을 벗지 말라고 했죠 가면무대에 익숙하지 않은 그는 몇 번 NG를 내고 지적을 받네요 말할 때는 벗고,대화가 끝나면 입을 막고 울어야할지 웃어야할지 무대는 뒤죽박죽 한소운 시인 / 달빛이 쓰고, 바람이 읽고 좀처럼 잠은 오지 않고 불도 켜지 않은 집안을 달빛이 지킨다 자정 무렵 지낸 제사상 다 치우기도 전에 자식들은 제 집.. 2023. 2. 8.
마경덕 시인 / 만가(輓歌) 외 1편 마경덕 시인 / 만가(輓歌) 그 소리는, 이슥도록 갯가를 떠돌다가 아스라이 멀어졌다 산동네에서 아랫마을로 내려와 밤바다를 철썩이며 선잠을 흔들던 청승맞은 그 기운은 언젠가 밤길에서 만난 혼불처럼 어둠의 틈새로 사라지고 어느 순간 소리에 꼬리가 돋아 그 꼬리를 붙잡고 가늘게 명줄을 이어 갔다 주거니 받거니 물보라를 일으키는 애끊는 리듬은, 풍랑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종오 엄마가 다리 뻗고 바닥을 치며 울던 젖은 곡조여서 사무치고 사무치는 것이었다 누구일까 폐병쟁이 황 씨, 노름쟁이 곰보 천 씨, 지게꾼 학출이 아버지도 그 길을 따라갔는데 또 누구일까 날이 밝으면 집 앞을 지나가던 꽃상여와 꽃잎처럼 붉은 울음과 노잣돈 없어 못 간다는 요령 소리가 귓전에 매달려 어린것이, 세상을 다 살았다는 얼굴로 눈물을.. 2023. 2. 8.
류미월 시인 / 메탈은 멘탈 외 1편 류미월 시인 / 메탈은 멘탈 덤벨 들기 몇 번 하고 힘들어 내리려다 너와의 약속 지키려 앙버티고 서 있다 등줄기 흥건히 젖는다 몸이 점점 가벼워진다 기구와 한 몸 되어 체력을 다지는 건 하루를 돌아보며 자신을 바로잡는 일 불끈 선 근육 사이로 정신줄이 팽팽해진다 《정형시학》2022. 가을호 류미월 시인 / 꽃무늬 스카프 유품을 정돈하다 눈에 밟힌 그 스카프 기나긴 날 휘감았던 지나온 저린 얼룩 어머니 가루분 체취 꽃잎 위에 실어온다 장롱 속 수납장에 잠자듯 가물거리고 어느 날 먼지 털다 발등에 툭 떨어진 한순간 소름 돋듯이 꽃무늬가 고개 든다 말로는 차마 못해 안부 묻는 몸짓으로 강 건너 보내오는 후드득 매화 소식 어느새 또 봄이 오려나 거울 앞에 환하다 류미월 시인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문.. 2023. 2. 8.
홍숙영 시인 / 줄다리기 외 1편 홍숙영 시인 / 줄다리기 ​ ​ 닫혔던 아지트에 불이 켜졌어요 같은 길을 오가며 암흑 속의 움직임을 주시했죠 밀크티가 달지 않아 입맛에 딱 맞고, 딱딱한 의자가 불편하지 않아요 천만다행으로 천장은 무너지지 않았고, 모녀의 사투리는 암호처럼 들려오네요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디저트로 하루를 마감해요 크리스마스트리는 검색에서 롱 패딩에 밀렸대요 안은 바깥에, 아래는 위에, 빛은 어둠에 밀려 힘을 쓰지 못해요 간판이 없어도 간판에 밀리지 말아요 몇 발의 뒷걸음질은 익숙한 전략이죠 정직한 양과 깊숙한 볼우물의 힘으로 자, 영혼을 끌어 모아 힘껏 당겨요 ​ 계간 『시작』 2022년 봄호 발표 ​ 홍숙영 시인 / 낮달 낮은 숨어 있기 좋은 시간, 민낯을 내밀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별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니 한숨.. 2023. 2. 8.
조옥엽 시인 / 수(壽) 외 1편 조옥엽 시인 / 수(壽) 숟가락에 글자 하나 걸려 있다 꽃 모가지 허공에 걸리듯 대롱대롱 걸려 있다 해서체의 목숨壽 숟가락이 곧 목숨이란 말인가 숟가락에 목숨이 달려있단 말인가 이승에 와서 맨 처음 만나 뜨거운 입맞춤 거듭하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갈라서는 수시로 긴밀히 접촉하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거의 없는 하나 가만히 되짚어보면 생사를 가리는 척도가 된 지 오래인 이 세상 누구보다 큰일을 하고 있는, 큰 말을 하고 있는 우리 역사가 진행 중인 숟가락 하나 우리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숟가락 하나 지나온 생 돌아다보듯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시집 『불멸의 그 여자』 2021년 포지션 조옥엽 시인 / 너에게 쓰는 편지 가버린 날들은 모두 봄날이었다는 말, 귀 밖으로 흘려들으며 살았다 복잡한 .. 2023. 2. 8.
이주송 시인 / 식물성 피 외 1편 이주송 시인 / 식물성 피 ​ ​ 버려진 차의 기름통에선 몇 리터의 은하수가 똑똑 새어 나왔다 빗물 고인 웅덩이로 흘러 들어가 한낮의 오로라를 풀어 놓았다 그러는 사이 플라타너스 잎들이 노후된 보닛을 대신하려는 듯 너푼너푼 떨어져 덮어 주었다 칡넝쿨은 바퀴를 바닥에 단단히 얽어매고 튼실한 혈관으로 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햇빛과 바람, 풀벌레와 별빛이 수시로 깨진 차창으로 드나들었다 고라니가 덤불을 헤쳐 놓으면 그 안에서 꽃의 시동이 부드럽게 걸렸다 저 차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식물성 공업사에 수리를 맡긴 것이다 그래서 소음과 매연과 과속으로 탁해진 그동안의 피를 은밀히 채혈하고 자연수리법으로 고치는 중이다 풀잎 머금은 이슬로 투석마저 끝마치면 아주 느린 속도로 뿌리가 생기고 언젠가는 차의 이곳저곳에 새들.. 2023. 2. 8.
김영서 시인 / 고요했으면 외 1편 김영서 시인 / 고요했으면 사무실 앞에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다 출근부터 요란한 소음과 함께 근무 중이다. 두드리고 긁히고 떨어지는 소리로 뼈를 만들어 층을 높혀가고 있다 마디가 하나 더 생길 때마다 소리가 가까이 들린다 창조는 고요를 깬다 인부들이 빠져나간 주차장은 쓰레기가 많다 여러번 부탁 했지만 소용이 없다 소음만큼이나 당당하다 퇴근길에 차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수납장에서 보온병이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파트로 퇴근을 한다 소리로 지어진 아파트는 풍금 건반을 닮았다 고요한 세상은 이미 틀렸다 층간소음으로 싸움을 하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 되었다 김영서 시인 / 당신의 그림자 어르신이 한자리를 계속 쓸어내고 있다 쓰레받기에 들어가지 않은 것을 희미해진 노안으로 자세히 살펴보니 그림자다 그림자.. 2023. 2. 8.
이진욱 시인 / 동행 외 1편 이진욱 시인 / 동행 아내와 사별한 친구와 밤새 술잔 속을 걸었다 차박차박 내리는 비가 깊은 잔을 채우는 소리만큼 가까웠다 비는 눈물을 가리고 빗소리는 울음을 먹었다 목련꽃 아래 친구 머리가 하얗게 셌다 -이진욱 시집 『눈물을 두고 왔다』(시인동네, 2016.) 이진욱 시인 / 프로골퍼 아폴로 14호 셰퍼드 선장은 달 표면에 내려서기 전 6번 아이언과 골프공을 챙겨 착륙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달 표면에 흠이 생겼다 이진욱 시인 1969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 2012년 《시산맥》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눈물을 두고 왔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2023. 2. 8.
강경호 시인 / 아버지의 이 외 2편 강경호 시인 / 아버지의 이 뿌리 드러낸 고목처럼 하나 남은 아버지의 이, 우리 가족이 씹지 못할 것을 씹어주고 호두알처럼 딱딱한 생 씹어 삼키기도 했던 썩은 이 하나가 아직도 씹을 무엇이 있는지 정신을 놓아버린 채 잠 속에서도 쓸쓸하게 버티고 있는가 - 시집 『잘못 든 새가 길을 낸다』 강경호 시인 / 눈 눈이 부드럽다고 눈이 포근하다고 처음에는 그랬지 짓밟지 마라 저 빛나는 殺意 너를 쓰러뜨리리라. -시집 『잘못 든 새가 길을 낸다』 강경호 시인 / 마침내 사람이 되었다 영신당靈神堂 이사간 마당 한켠 비에 젖은 부처님 하나 가느다란 미소 짓고 있다 대웅전 높이 앉아있던 존귀한 몸이 오늘은 옆구리가 찢겨진 채 쓰레기장에 버려져 있다 부처님은 버림받을 줄 몰랐는데 부처님에 대한 관념을 부수기라도 하려는 .. 2023. 2. 8.
김정인 시인 / 일출 외 2편 김정인 시인 / 일출 분만실 창을 가린 블라인드 사이로 수평선이 여러 겹 겹쳐 있다 나는 등 뒤로 딸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어둠을 찢고 나오는 우렁찬 햇살 기다리고 있다 해가 내게 당도하려면 울음의 강을 건너야 한다는 생각 산모는 해를 밀어낼 통로를 여느라 제 살 찢는데 혈압 체크하던 간호사는 갈 길 멀었다는 듯 수액 빠진 링거 다시 갈아 끼운다 견딜 수 없이 조여드는 가슴 딸과 나의 공통분모는 탯줄의 출구를 묶고 번진 피 아물기를 기다리는 일 안이 젖은 고무장갑 뒤집어 말리듯 항문으로 온 힘 밀어내는 소리 들리는데 ‘머리가 3센티 보여요!’ 떠오르는 그 해 눈부셔 눈부셔 차마 바라보지 못하다가 으앙, 터진 울음 받아 올리다 ―『유심』(2011, 3/4월호) 김정인 시인 / 십자가 이마에서 가슴으로 심장 .. 2023. 2. 8.
홍재운 시인 / 라훌라 외 1편 홍재운 시인 / 라훌라 라훌라! 네 콧수염에서 노랫소리가 들려, 뿌연 언덕은 흘러내리고 어제 읽었던 풍경이 떠나고 라훌라! 소떼를 본다 지붕 위에 앉아 지나가는 연기가 되어 천 번의 계절이 지나가는 옥상이야, 아홉 살 소년이 지나가며 손을 흔들었지 얼굴이 지워진 염소의 수염 에서 나뭇가지가 걸어오네 보이지 않는 신발, 라훌라 너를 재우고 우리 먼 길을 가자 수면이 차오른다 오지 않는 밤을 깨우며 의식을 폭식하면서 늙어가는 라훌라! 잡을 수 없는 라훌라! 종이 봉지를 통과하는 나는 내가 아니고 네가 아닌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단다 라훌라! 꿈꾸고 있니? 냄새가 오지 않아, 어둠은 핏빛으로 피어나고 너는 아픈 경전이고 바람 이 지나간 늪이야 끝나지 않는 기둥이야, 라훌라! 눈 뜨지 마라 멈추지 마라 라.. 2023. 2. 7.
하린 시인 / 서민생존헌장* 외 1편 하린 시인 / 서민생존헌장* ​ ​ 나는 자본주의적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서민으로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가난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신용불량자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약소국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생존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출근과 튼튼한 육체로, 저임금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출신을 계산하여,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기초수급자의 힘과 월세의 정신을 기른다. 번영과 질서를 앞세우며 일당과 시급을 숭상하고,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헝그리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대기업이 발전하며, 부유층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지름길임을 깨달아, 하청에 하청에 따른 책임과.. 2023. 2.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