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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완호 시인 / 나무의 발성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6. 2.

박완호 시인 / 나무의 발성

 

 

씨앗이라고, 조그맣게 입을 오므리고

뿌리 쪽으로 가는 숨통을 가만히 연다.

새순이라고 줄기라고 천천히

좁은 구멍으로 숨을 불어 넣는다.

길어지는 팔다리를 쭉쭉 내뻗으며

돋아나는 가지들을 허공 쪽으로

흔들어 본다. 흐릿해지는 하늘 빈자리

연두에서 초록으로 난 길을 트이며

이파리가 돋고 꽃송이들이 폭죽처럼 터지는 순간을 위해

아직은 나비와 새들을 불러들이지 않기로 한다.

다람쥐가 어깨를 밟고 가는 것도

몰래 뱃속에 숨겨둔 도토리 개수가

몇 개인지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한다.

하늘의 빈틈이 다 메워질 때쯤

무성한 가지들을 잘라내고 더는

빈 곳을 채워 나갈 의미를 찾지 못할 만큼

한 생애가 무르익었을 무렵

가지를 줄기를 밑동까지를 하나씩 비워가며

기둥을 세우고 집을 만들고 울타리를 두르고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의자와

몇 권의 책 빈 술병을 올려둘 자리를 준비한다.

그리고는 어느 한순간 잿더미로 남는

황홀한 꿈을 꾸기 시작하는 것이다

더는 아무것도 발음할 필요가 없는

바로 그 찰나, 나무는 비로소

한 그루 온전한 나무가 되는 것.

 

나-無라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천천히 발음해 본다.

 

웹진 『님 Nim』 2023년 2월호 발표

 

 


 

 

박완호 시인 / 양팔 문신

 

 

양팔 가득 문신을 새긴 여자와 나란히 앉아

다국적 문자 기호와 맥락 모를 그림이

빼곡하게 새겨진 팔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무얼 하는 사람일까?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오만 가지 생각으로 한 사람의 이력을 훑어보는 시간

 

한번 떠오른 편견은 또 다른 편견을 낳고 편견의 사생아들이 줄지어 태어나는 사이

어느새 나는 괴물 옆에 앉은 또 다른 괴물이 되어가고

반 팔 옷만 입지 않았어도 아무것도 아니었을,

한 사람을 향한 쓸데없는 상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머릿속을 고스란히 들켜버린 것 같아

고개도 못 돌리고 속으로만

이러지 말자 이러지 말자 할 때

 

어디서 젖먹이라도 달래주다 왔을지 모를 여자의

팔목 아래 하얀 손등 손가락이 눈 속을 채우더니

 

갑자기 낯설어진 한 사람이 순진무구한 표정과 함께

차창을 흐르는 풍경 속으로 첨벙첨벙 발을 내딛는 것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바라보는 나의

못난 이목구비가 또렷해져 가는 유리창 너머로

서둘러 달아나고만 싶어지는 것이었다

 

계간 『미네르바』 2021년 봄호 발표

 

 


 

 

박완호 시인 / 번지점프

 

 

서로 먼저 죽겠다고,

추락할 때를 기다리다 말고

번지점프 티켓 같은

패를 번갈아 손에 쥐고 돌리며

 

매번 새로운 낙엽이 진다, 허공에서는

 

이파리가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낯선

꿈의 새순이 덧니처럼 돋았다 지워지고

 

잇단음표를 달고 몰려드는,

티켓도 없이 앞다퉈 떨어져 내리는

암표 구매자들

 

낙엽 진 자리에 돋아날

연한 절망은 그러므로

나의 몫이 아니다, 그건

 

나도 모르는 나의

얼굴, 꿈에서조차 만날 일 없는

민낯의 절망

 

일련번호 없는 번지점프 티켓을 손에 들고 저기 아무렇게나 서 있다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2년 3월호 발표

 

 


 

박완호 시인

충북 진천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기억을 만난 적 있나요?』, 『너무 많은 당신』, 『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 『아내의 문신』, 『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 『내 안의 흔들림』 등이 있음. 김춘수시문학상 수상.  경희문학상 수상. 〈서쪽〉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