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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종인 시인 / 안경을 바라보며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6. 2.

유종인 시인 / 안경을 바라보며

 

 

벗어놓은 안경은 골똘함이 직업 같다

거실에 놓였어도 광야를 내다보듯

은애(恩愛)의 훤칠한 시력을

불러보는 침묵 같네

 

인간을 벗었으니 누가 쓰면 마뜩한가

섬잣나무 등걸이나 고물이 된 자전거에

아니면 외눈박이 고양이

그대 한번 써볼 텐가

 

스러지는 향기한테 콧등 높여 씌워보면

주니가 든 시문(詩文)한테 훈김처럼 씌운다면

백리향 만리향이 번질까

송뢰(松籟)품은 애체(靉靆)여

 

 


 

 

유종인 시인 / 월척

 

 

올봄에는 무엇이나 이 눈물겨움이 월척일세

 

어미 몸을 먹고 자란 거미 새끼도 월척이고

 

우주의 모래알 같은

 

외사랑도 월척일세

 

 


 

 

유종인 시인 / 마음

 

 

하루는 눈물 글썽한 상거지가 다녀갔다

 

또 하루는 꽃도 없이 바위가 그늘졌다

 

오늘은 술이나 받게

 

죽통(竹桶)처럼

 

비었다

 

 


 

 

유종인 시인 / 답청(踏靑)

 

 

1

맨발로 밟고 가자

바람을 밟고 가자

 

피를 좀 흘려보자 초록을 좀 눌러보자

 

헌혈차

문을 밀고서

겨울 피를

 

봄에

주자

 

2

들판은 연둣빛 들판

돌아올 땐 초록 들판

 

외딴 것들

빈손에는

연애담이 풀물 들어

 

지구에

또 사랑이 걸린다

짙어가자

마음이여

 

3

비천한 듯 고고한 듯 가난한 듯 소슬한 듯

 

그러나 품고 넘자

거리의 소산일랑,

 

맨발로 달려가 맞자

천둥 치는

천기(天機)의 들

 

 


 

 

유종인 시인 /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인을 위한 파반느

 

 

백발의 저 노인은 백 년 전도 백발 같아

앞서 가 뒤돌아보니 자작나무 풍채인 게

거뭇한 옹이 마디에

웅숭깊은 눈을 떴네

 

공중의 어느 좌표에 화장실을 세워놓고

새들은 꼭 그 자리서 뒷일을 보는갑다

흰 새똥 뒤집어쓴 바위가

천년 가는 혼수(婚需)같네

 

잎새가 죽은 난과 새 촉이 돋는 난(蘭)은

한 바람에 다른 결로 햇빛 속을 갈마들며

터 잡은 고요의 심지에

수결(手決)하듯 꽃을 버네

 

남녘의 섬 한 귀퉁이 나를 번질 터가 있어

독필(禿筆)의 그 날까지 번민을 받자 하니

툇마루 볕 바른 자리에

선지(宣紙)펴는 댓잎 소리

 

야자수와 소나무가 쪽동백을 아우 삼듯

까마귀와 갈매기가 청보리밭 답청하듯

숨탄것 지상의 한 걸음씩

몸을 내는 얼이 있네

 

 


 

유종인 시인

1968년 인천에서 출생. 시립인천전문대학 문헌정보학과 졸업. 1996년 《문예중앙》에 시 〈화문석〉 외 9편이 당선되어 등단. 200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과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 시집으로 『사랑이라는 재촉들』 『아껴 먹는 슬픔』과 『교우록』 『수수밭 전별기』 『숲시집』 시조집 『얼굴을 더듬다』 등이 있음. 지리산문학상, 송순문학상, 지훈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