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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창옥 시인 / 배회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6. 1.

한창옥 시인 / 배회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의 눈빛이

자석처럼 빨려들게 한다

주파수를 잃은 무성음에 눈물이 고인다

오롯이 마음 준 사람을 내려놓지 못하고

돌아오지 않는 숱한 꿈을 기다리며

까맣게 타들어간 상처는

또 다른 욕망을 배회하다가

해안의 어깨를 빠져나오고 있다

해운대 바다의 모래알만큼이나

신열을 앓던 시간들이 차마 만질 수 없어

갈매기 따라 무리지어 날아오른다

가장 비릿하고 뻐근하게 다가서는

소리 없는 몸짓이 미련스럽지만

선혈을 쏟아내며 떠오르는 태양을 끌어안고

해돋이 마중에 뗏목처럼 밀려오는

무겁게 눌린 시간을 주섬주섬 털어버린다

 

 


 

 

한창옥 시인 / 팝콘

 

 

아가의 말문이 톡톡 터진다

 

엄마의 웃음이 팡팡 터진다

 

꽃이 피는 것은 나무만이 아니다

 

안방에서 마루에서 꽃망울 마구 터진다

 

가을햇살 품고 오는 바람의 날갯짓에도

 

팡팡 톡톡 터지는......

 

함박눈 같은 도리질 같은

 

 


 

 

한창옥 시인 / 무성영화처럼 목청껏 터트리지 못하고

 

 

제어되지 않은 말들이 바람을 타고 진화한다

 

빗장을 걸어 잠근 자존심의 관절마다 아프다 말 못하고

쓰러진 지상의 뼈들은 애써 몸 낮추고 있다

꼿꼿한 코로나 담장을 휘어 감고

꽃의 덩굴은 비틀대며 오르기 시작하는데

 

폐쇄된 봄날의 입구는

목청껏 터트리지 못하고 입김만 내뿜고 있다

기척도 없이 기약 없는 침묵은

여전히 고립되어 일탈하려던 발끝에 힘만 주고

그럼에도 봄꽃은 거침없이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다

가려진 미소로 옷깃을 부딪치는

멀고도 가까운 사람들

 

오래된 무성영화 향수에 빠져

막과 막 사이로 빨려가듯 무작정 들어간다

 

 


 

 

한창옥 시인 / 겨울 폭풍, 그리고 봄

 

 

떠나는 것이 서러워 몇 날 며칠

창문을 흔들다가 지쳐서 가버린 너

 

맨발로 뛰어나가 보니 흔적은 없고

 

보초처럼 서 있는 푸른 달빛에 아무 일 없듯

언 땅에서 빠져나오려는 몸부림이 수북했다

 

쓸쓸한 고통을 견디며

낭만주의자처럼 지상에 발을 딛고

 

새롭게 움트려고 몹시 애쓰고 있었다

 

 


 

 

한창옥 시인 / 수묵화

 

 

무심하게 롱패딩을 걸치고

깊은 주머니 속의 하얀 수런거림을 듣는다

뜨겁게 커피를 나눠 마시며

지하철 계단을 지나 광장 속으로

희고 검은 펭귄들이 뒤뚱거리며 간다

침묵처럼 내리는 눈발이 어쩌면 슬프다

스쳐 지나간 발자국 따라

세상은 흰빛 아니면 검은빛

흑백장면의 필름이 돌아간다

붉은 부리의 펭귄 한 마리가

시절을 가로질러

뒤뚱거리는 걸음 변치 않을 것 같은

긴 파장이 차마 위태롭다

희고 검은 롱패딩자락 펄럭이는 거리에

반짝이는 눈발은 어느 시대의 아이콘인지

지금 잠꼬대 같은 한낮의

희고 검은 수묵화 한 점 그린다

 

 


 

 

한창옥 시인 / 쓰윽 베이다

 

 

손에서 빗나간 사기그릇이 쨍그랑 조각났다

한 조각씩 주워 모으는 손가락을

쓰윽 베이고 만다

 

소중히 여겼던 것이

나도 모르게 나를 향한 칼날이 되었다

 

피가 흐르는 손가락끼리 마주보며 슬퍼진다

 

손때 타도록 아끼던

차갑게 조각난 그릇을 다정하게 쳐다본다

 

이미 깨어진 것, 이어 붙이는 것은 어렵다

저마다 다른 해석에 따라

저마다 다른 감정을 품게 되는 것이니

후회할 여유조차 없다

 

베인 손가락을 쳐다보는 칼날은

조각조각 고개를 들고 하얗게 웃고 있다

 

-시집 「해피엔딩」 2023년, 포엠포엠

 

 


 

한창옥 시인

서울 송파 출생. 1982년 '바우방' 문학동아리 활동. 2000년 시집 『다시 신발 속으로』로 시작활동 시작. 시집 『빗금이 풀어지고 있다』 『내 안의 표범』 『다시 신발 속으로』가 있음.  2017년 세종우수도서 문학나눔 선정. 중요무형문화재 송파산대놀이.답교놀이. 인간문화재49호인 부친을 기린 ‘한유성문학상’ 제정. 현재 시전문지 「포엠포엠」 발행인. 편집주간.계간 『부산시인』 편집주간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