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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낙추 시인 / 익모초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6. 1.

정낙추 시인 / 익모초

 

구월 초아흐레 지나고

첫서리 오기 전

어머니는 흥주사*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절집 근처에서 익모초를 한 자루 뜯어 오셨다

볕 좋은 날 그늘에 말린

익모초

몸이 냉한 여자의 입술 같은 푸른 잎과

폐경이 가까운 여자의 마른 이슬 같은 자주색 꽃에서는

가슴이 타는 어머니의 쓴 냄새가 풍겼다

여자는 어미가 되어야 여자니라

뱃속에 들어선 생명은 애가 아니라 부모니라

오이꽃처럼 노랗게 뜬 얼굴로

친정에 들락거리던 누님은 그해 겨울 내내

금계랍보다 쓴

어머니를 먹고 여자가 되었다

여자의 여자가 또 어미가 된 세월

몸에선 온기도 냉기도 돌지 않고

달마다 피던 이슬의 기억도 희미해진

아주 오래 묵은

익모초 한 그루

가을볕 아래서 여전히 어미 노릇을 하고 있다

*흥주사: 태안 백화산 자락의 작은 사찰

 

 


 

 

정낙추 시인 / 천리포의 봄

 

봄날

천리포에는 바다가 없다

바다는 천리 밖 아득히 물러서고

대신 은빛으로 치장한 까나리 떼들이

백사장에 드러눕는다

알 밴 보름달을 밀어내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

주체하지 못할 욕정에 끌려

천리를 마다 않고 달려온 까나리 떼

백사장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순간

사랑을 잃는다

다시 바다로 뛰어들고 싶어 눈을 크게 뜨지만

이미 몸은 바싹 말라비틀어지고

바다는 벌써 다른 사랑을 키우고 있다

봄날, 천리포 모텔은 대낮에도 붐빈다

 

 


 

 

정낙추 시인 / 별꽃풀을 아시나요

 

가을에 튼 어린 싹

엄동 넘기더니

입춘 지나기 무섭게

다닥다닥 꽃 피운다

청천 하늘에 잔별두 많구요

우리 밭에는 지슴두 많구나

며느리 게으르다고 구박할 때마다

요긴하게 써먹었다는

별꽃풀

우리 집 여자 호미 들고 나설 때마다

이놈의 지긋지긋한 나이롱풀, 월남풀

희한하게 작명도 잘 한다

풀이름이

별꽃풀이란 내 말 척 받아

염병할 놈의 별풀인지 별꽃풀인지

꼴같잖은 게 이름은 예쁘네

징글징글한 웬수 덩어리

 

 


 

정낙추 시인

1950년 충남 태안 출생. 1989년부터 지방문학 동인지 '흙빛문학'에서 활동. 2002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시집 <그 남자의 손> <미움의 힘> 등. 태안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소금을 옛 방식대로 재현 복원한 <태안자염> 대표. 농산물 인터넷쇼핑몰 <태안장터 영농조합> 대표로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