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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동호 시인 / 저물무렵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6. 2.

신동호 시인 / 저물무렵

 

 

황혼이 어깨 위에서 오래도록 머물러주길 바랬습니다

손때를 많이 탄 느티나무 밑둥으로 풀벌레들이 기어드는 무렵

언덕으로 저녁연기가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마음 한 켠이 아득해지고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아 거기엔 당신이 있었습니다

겨울 하늘에 맨 돌팔매질 하던

황혼이 물든 들녘을 이내 바라보고 섰던

언덕배기엔 썰매타기와 연날리기가 아이들을 기다리고

쓸쓸한 저녁을 위해, 저물 무렵 못내 그리운 마음의 아련함이란

그 때문일까요

낮 동안, 그래서 아이들이 피운 부산스러움과 먼지더미는

아름다운 게 아닌지요

언덕배기에 앉으면 당신이 자라온 마을과

지나온 길이 함께 어두워져 가고

그때 불어오던 바람이 아 당신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던 사람들 많았기에 가슴 시리지 않던가요

지나온 길 위에 덮인 어둠이 결코 당신이 걸어온 길을

지울 수 없기에

언덕배기 느티나무에 기대앉은 당신의 마음은 쓸쓸하지 않던가요

쓸쓸한 것은 그리운 사람 많은 탓이지요 아쉬운 날이 많은 탓이지요

이미 마음속에 그려진 풍경. 아름답던 당신알지요

언덕배기에 바람이 불고 날이 저물고 그런 내내

황혼이 어깨 위에서 오래도록 머물러주길 바랬습니다.

 

-시집 <저물무렵>. 문학동네, 1996.

 

 


 

 

신동호 시인 / 겨울날, 눈꽃처럼

 

 

저 산에 메아리 있는 줄 이제야 알겠네

깊은 골짜기와 너른 산등성을 닮아

건네는 손 잡아준 당신을 알고 나서야

저 산에 메아리, 사랑처럼 다시금 내게 돌아오는 줄 이

제야 알겠네

 

겨울날이 아름다운 줄 이제야 알겠네

겨울 나무의 눈꽃처럼

잎진 자리에 당신이 호올로 피어

겨울날, 꽃을 피울 수 있는 사랑이 아름다운 줄 이제야

알겠네

 

만남은 우리에게 지난 일을 가슴에 담고 살라 하고

만남은 한 사람의 지난날과 다른 한 사람의 지난날을 더

수많은 날을 더불어 살라 하고

우리들이 만나던 시절, 문득문득 잊혀져가던

뜨거운 마음을 되살아나게 하고

그리하여 만남은 젊은날의 우리를 영원히 지키라 하네

그리하여 당신을 만나던 그 시절도 영원히 살아 있고

사랑도 살아 있고

 

그렇게 살아 있는 사랑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지 이제야 알겠네

바람은 불고 눈이 내렸지만

변하지 않고,지켜보라 하던 산처럼 눈물처럼

한 시절은 빛나던 새벽이다가 한때는 황혼 무렵일 수도

있는 것

그렇지만 사랑이여

산처럼 눈물처럼, 넓어지고 마음 깊어지고

당신을 만나고 세상을 만나고

한 시절의 모든 편린을 담아낸 사랑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지

나 이제야 알겠네

 

 


 

신동호 시인

1965년 강원도 화천 출생. 1984년〈강원일보〉신춘문예 당선, 1992년 《창작과비평》에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 활동을 시작. 시집 『겨울 경춘선』 『저물 무렵』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산문집 『유쾌한 교양 읽기』 『꽃분이의 손에서 온기를 느끼다』 『분단아,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