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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14021

이은주 시인 / 시간의 얼굴을 보면 외 1편 이은주 시인 / 시간의 얼굴을 보면 1과 2사이에 촘촘한 구멍이 있어 잘디잘게 부서진 검은 빛이 울컥거리며 새어나오지 3과 4는 빛을 움켜잡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지 아주 가끔씩 여지를 주는 듯해 그 속임수에 놀아나는 것을 알면서도 구멍 너머를 넘볼 수밖에 없어 3과 4로 턱없이 부족해 5와 6을 깨워야 한다는 것을 알지 아니 안다는 게 아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거지 7과 8은 계약이므로 의무적이지 8까지 흘러왔다고 해서 이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며 자위에 다름 아냐 9와 10까지 애를 써야 해 눈을 감아선 안 돼 11까지를 걸고 12를 낚아채야 해 그래서 미끄러질 때까지 질퍽해져 보는거야 12 너머 그 어디쯤, 13이어도 괜찮을 구멍과 열쇠, 그 다른 이름이어도, 그 이름을 찾을 때까지, 다시 .. 2023. 2. 5.
김산 시인 / 치명 외 1편 김산 시인 / 치명 푸른 저녁이 등의 짐을 잠재우는 시간으로 돌아가겠다. 고독의 밀실로 말하노니, 구름의 검은 조등이 맨발 아래 스멀거리는 구나. 죄를 지은 사람과 죄를 벗은 사람 사이에서 분분히 포말 되는 거울의 말을 사랑한 적 있다. 섬이 떠다닌다. 한 섬 두 섬세 섬 선한 양들을 부르듯. 섬은 별의 공동묘지. 저기 아래, 죽음의 정박을 절체절명의 몸부림이라고 이해하겠다. 어둠이 하얗다고 소년이 소리친다. 그것은 비석의 그림자를 본 늙은 매의 날갯짓이 전생을 파닥거리는 불온한 외침. 어린 송장의 관의 문을 열고 비로소 명멸하는 저녁, 잔디들이 일제히 일어나 향을 피우며 음복을 한다. 바람의 후레자식들이여! 무릎 꿇고 고개를 숙여라. 집을 잃은 성근 별들이 뜨거운 손을 잡고, 들개 한 마리가 앞발을 천.. 2023. 2. 5.
정지우 시인 / 복도의 소용돌이 외 1편 정지우 시인 / 복도의 소용돌이 ​ 돌은 물의 반대 방향으로 놓여 있다 그래서 물보다 느리다 막 열리려는 문과 귀를 쫑긋 대고 있는 문의 안쪽 막다른 쪽으로 바람은 불어온다 그건 누구나 배경일 뿐이라는 것 사람이 사물이 되어가는 일 첫 번째 문을 지나면서 목소리는 작아지고 비밀스러워진다 귓속에 밀어 넣은 두 번째 문이 생겨날 때 우리는 각자의 질서에 갇히고, 누구도 깨트릴 수 없는 침묵이 우두커니 복도를 지킨다 안이 보이는 등 뒤로 밖의 얼굴이 흘러가서 고인다 순간, 쪼그라든 사과 속의 사과 119 대원들이 싣고 가는 죽음 열흘이 지나도 모르고 오가던 복도는 겹친다 불행의 주머니를 뒤집으면 행복일까 마치 물속의 돌이 서로를 껴안고 휘몰아치며 바다에 닿는 것처럼 사람이 사람을 기다리는 것보다 문 앞에 쌓인.. 2023. 2. 5.
조율 시인 / 적도 외 1편 조율 시인 / 적도 ​ 옥탑방 평상에 앉아 수박에 칼을 찔러 넣는다 수박의 적도부근이다 지구본으로 따진다면 한 중앙에 에콰도르의 어느 도시 정도가 되겠지 이곳은 뜨거운 열대우림, 곰팡이가 타잔처럼 천장을오르는 옥탑방, 생각한다, 왜 나에게는 선글라스 끼고 일광욕을 즐기는, 그런 적도가 지나가지 않는가? 눅눅한 근로계약서에 손가락을 빌려줄 때마다 낮은 태양이 양철지붕 위로 더 무겁게 녹아 붙는다 가로줄이 많은, 빈칸이 많은, 적도가 많은 주름진 종이 속에는 엷은 비늘이 숨어 있다 적도를 벗어난 열대어의 서글픈 눈망울이 끔뻑인다 온통 경력자들만의 광고 박스, 열대성 기후 지구의 허리춤을 적도가 점점 조이고, 조여 오면 이거 벨트에 구멍을 하나 더 뚫어야 하나? 난간에 서서 입 안에서 우물거리던 수박씨를 뱉는.. 2023. 2. 5.
황인숙 시인 / 내 삶의 예쁜 종아리 외 1편 황인숙 시인 / 내 삶의 예쁜 종아리 오르막길이 배가 더 나오고 무릎관절에도 나쁘고 발목이 더 굵어지고 종아리가 미워진다면 얼마나 더 싫을까 나는 얼마나 더 힘들까 내가 사는 동네에는 오르막길이 많네 게다가 지름길은 꼭 오르막이지 마치 내 삶처럼 -시집 - 황인숙 시인 / 강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이.. 2023. 2. 4.
이병철 시인 / 겨울바람의 에튀드* 외 1편 이병철 시인 / 겨울바람의 에튀드* 당신의 발가락은 오래된 건반, 거기서 떨어진 봄의 기억은 모두 음악이 되었다 악보를 읽을 줄도 모르면서 계속 걷는 발이 불쌍해, 발톱이 튕겨내는 겨울을 창백한 소리로 노래하며 걷고 또 걸었다 내 입술은 당신의 언 발가락을 녹일 수가 없어, 햇빛을 날카롭게 갈아 굳은살을 베어내도 차가운 음계는 발끝을 떠나지 않았다 이 음악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자, 발가락이 유리잔 처럼 깨져버릴 것만 같아 폭설은 이미 잘 짜여진 한 벌의 옷처럼 우리를 감쌌고 얼음의 숨소리가 귓가에 파란 브로치를 달았다 발톱에서 솟아오른 달이 하얗게 변할수록 길은 불협화음으로 부서져갔다 유리 바다를 걸어도 얼어붙은 발에선 피가 흐르지 않았다 따뜻한 바람이 발가락 사이에서 불어왔다 한 계절보다 긴 음악이 .. 2023. 2. 4.
김길녀 시인 / 더러는, 외 1편 김길녀 시인 / 더러는, 다가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감 조금 줄장미 안간힘으로 기어오르던 국세청 담벼락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일몰의 한때 쟈스민 꽃잎에 묻은 과자부스러기에 줄지어 나타난 흰개미 행렬 큰 길 옆 분수대 우뚝 솟은 꼬리 달린 거인 남자 조각상으로 쏟아지는 한낮의 스콜 모래 조각 즐비한 골짜기 찾아가다 만난 소금호수 반짝이던 시간을 주머니에 넣기도 하는, 자바섬 어귀에서 아픈 몸 먼저 다녀간 라다나무 꽃잎에 피어 있는 친절함과 마주한 오후가 있는 화요일 -유고시집 김길녀 시인 / 지금, 비우고 비워서 속까지 훤히 드러낸 겨울 숲 나무들처럼 몹시 좋아하는 우울과 적막과 슬픔마저도 찰나의 행간 없이 벙글 벙글 벙글 맘껏 부풀어 오르시라 다만, 식물로 태어나 나무로 살아가는 오래된 생애처.. 2023. 2. 4.
김고니 시인 / 아주 오래된 자작나무 아래 외 1편 김고니 시인 / 아주 오래된 자작나무 아래 불꽃 속에서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는 자작나무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숨겨두고 살았을까 새들도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는데 나는 엄마를 부르며 운다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이 엄마였구나 어릴 적엔 자작나무의 몸은 수피가 벗겨진 벌거숭이라고 생각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하고 맨발로 서 있는 나무 불꽃 속에서 뜨거워진 몸으로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는 나무 울음 속에 아주 오래된 글자를 새겨놓고 벌거벗은, 엄마의 마지막 숨결이 타오를 때 자작나무야, 하고 불렀다 맨발로 서 있던 고단한 다리를 눕히고 불꽃 속에서 내 이름을 불러주던 엄마 그러고 보니 내 이름도 자작나무였다 계간 『스토리문한, 2018 가을 겨울호 』,《문학공원》에서 김고니 시인 / 발자국 새가 지나간 발.. 2023. 2. 4.
송과니 시인 / 대나무 영토 외 1편 송과니 시인 / 대나무 영토 가득함교敎에서 텅텅 비움교敎로 개종한 부족들 마디와 마디 사이에 푸른 여백 들이고 사는 죽녹원에 드는 날 인류는 하나의 부호가 된다. 하고 마디와 마디 사이 푸른 여백으로부터 달 응응 솟아오르면, 달이 솟아서 마음 두근거리면. 자꾸 두근거려서 수수 만 마디들이 사무친 가슴과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달 아래 모이면, 대는 제 여백을 꺼내어 당신 여백에 포갤뿐더러 그 영토에 텅 비웠으므로 가득한 나라 가는 길 제시하는 푸른 화살표 파종하고 담양 담양 선다. -시집 『내 지갑 속으로 이사 온 모티브』 2017 송과니 시인 / 한밤중에 울리는 종소리 살아남기 위한 존재 뱀, 그의 독은 생존의 미학. 독보다 더 독한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뱀 숱하게 휘갈겨 놓았다. 신이 그랬다. 때문에 .. 2023. 2. 4.
휘민 시인 / 얼굴 외 2편 휘민 시인 / 얼굴 순식간에 눈가의 주름이 사라지는 걸 본다 입 꼬리가 받쳐 든 골 깊은 두 개의 능선이 사라진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벽은 완강하지만 말은 살아 있다 수천수만 번의 찡그림으로 완성된 굴곡들 눈매가 깊어질수록 눈과 눈썹은 가까워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는 멀어져간다 긴 정적을 남기며 바이탈 사인이 멈춘다 의사는 그가 남긴 단말마의 시간을 기록한다 주름이 사라지자 얼굴에 고여 있던 말들이 갈 곳을 몰라 헤매고 있다 간호사가 그의 입속에 틀니를 끼운다 말들이 흘러내리는 그의 마지막 얼굴에 하얀 끈을 동여맨다 턱 끝에서 나비리본 하나가 만들어진다 얼굴 하나가 완성되려면 얼마나 많은 침묵을 견뎌야 할까 외로운 사람은, 또한 신비롭다* * 고트프리트 벤, 「외로운 사람은」에서 휘민 시인 / 칼의 춤 싸.. 2023. 2. 4.
김경인 시인 / 청혼 김경인 시인 / 청혼 차갑게 식은 태양은 꺼요 잠들지 않는 야광 해바라기를 붙여 놓을게요 유리창에 침을 뱉지 말아요 들러붙은 풍경은 지워지지 않으니까요 잠의 출구에는 못을 칩시다 입구에는 순하고 깨끗한 표정을 벗어 모양 좋게 걸어 둘 하얀 문 하나를 달고요 노란 진물을 내뿜는 기차를 타고 우리 끄덕끄덕 흔들릴까요 허공을 앉힌 의자처럼요 아껴둔 말을 적은 공책을 찢어 새처럼 날려 볼까요 그러다 죽은 새로 곤두박질치는 서로의 혼잣말을 첫눈처럼 꼭 쥐어 볼까요, 아니 거센 눈보라처럼 혀로 만든 계단을 오르고 내릴까요 그러다가 혀에 스미는 눈송이처럼 지워질까요 오늘 우리 귀엣말처럼 사소해집시다 추운 세계에서 날아가려다 붙잡힌 고통의 깃털을 산 채로 뽑아 만든 가볍고 포근한 이불 아래서 이웃의 나쁜 소식을 자장가.. 2023. 2. 4.
김종철 시인 / 칫솔질을 하며 외 2편 김종철 시인 / 칫솔질을 하며 요즘은 이 닦는 법을 다시 배웁니다 하루에 세 번, 삼종기도처럼 닦습니다 아침에 하는 칫솔질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온종일 해둘 말과 생각을 구석구석 닦습니다 점심때 하는 칫솔질은 생각 없이 불쑥 튀어나온 독설과 이빨 사이 낀 저주를 닦고 파냅니다 어쩌다 부러진 이쑤시개의 분노와 마주칠 때는 이내 거품을 물고 있는 후회로 양치질을 한 번 더 해둡니다 잠들 때 하는 칫솔질은 하루 종일 씹고 내뱉은 죽은 언어의 껍질을 헹구어 내고 생쥐같이 몰래 들락거렸던 당신의 목구멍에 경배 드리는 일입니다 하루의 재앙이 제 입에서 나왔다는 것을, 때늦은 반성문처럼 졸리운 칫솔로 꿈의 혓바닥까지 박박 긁어냅니다 김종철 시인 / 등신불 -등신불시편 1 등신불을 보았다. 살아서도 산 적 .. 2023. 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