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영 시인 / 이야기
"밤사이 시영이가 왔다 간 모양이시. 고연놈, 밝은 날 올 것이지 해필이면..." "아직 초저녁이던디 뭘 그러요. 서울이 여그서 얼매나 머요. 나는 여그 앉아 갸가 들가운데로 훵하니 택시를 타고 와서 꾸벅 절허고 후적후적 걸어 나가는 걸 다 봤" "......" "나 앞에는 술을 두 잔씩이나 따라놓았습디다." "그건, 자네가 여그 온 지 얼매 안 되었으니께 그렇지."
아직 이슬도 마르기 전, 간간이 햇빛에 몸을 뒤척이며, 밭둑 위로, 어느 외롭던 세 무덤이 도란도란...
*은빛호각, 무늬 , 사이 등 주옥같은 시집을 낳으셨다
이시영 시인 / 베스트셀러 시인들을 위하여
누구나 다 한때는 순결한 영혼들이었다. 독자들이 그 영혼에 입맞추자 그들은 곧 배부른 돼지들이 되어 부끄러움도 잊고 제 분홍 머리들을 서점의 진열대 위에 올 려놓은 채 호호 웃고 있으니 우리가 이제 싸워야 할 대상은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라 바로 저 상업의 노예들인지도 모른다.
이시영 시인 / 공사장 끝에
"지금 부숴 버릴까?" "안돼, 오늘 밤은 자게 하고 내일 아침에 ······." "안돼, 오늘 밤은 오늘 밤은 이 벌써 며칠째야? 소장이 알면 ······." "그래도 안돼······." 두런두런 인부들 목소리 꿈결처럼 섞이여 들려오는 루핑 집 안 단칸 벽에 기대어 그 여자 작은 발이 삐져나온 어린 것들을 불빛인 듯 덮어 주고는 가만히 일어나 앉아 칠흑처럼 깜깜한 밖을 내다본다.
이시영 시인 / 그네
아파트의 낡은 계단과 계단 사이에 쳐진 거미줄 하나
외진 곳에서도 이어지는 누군가의 필생
-시집, 『하동』, 2017, 창비
이시영 시인 / 미루나무
간밤 눈보라에 시달렸을 미루나무에 오늘은 새로운 까치네 동무들이 가득 찾아와 그 작은 발바닥으로 뱃바닥을 누르고 귓볼을 간지럽히는 바람에 온몸에 웃음을 참지 못한 나무는 새빨갛게 타오르는 서녘 하늘을 향해 껑충한 키를 구부린 채 간들간들 간들간들 웃고 있었습니다
이시영 시인 / 정님이
용산 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 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 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주더니 왜 가 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 섣달 긴긴 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랑잘그랑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 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 나올 것만 같더니 한 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 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 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이시영 시인 / 봄논
마른논에 우쭐우쭐 아직 찬 봇물 들어가는 소리
앗 뜨거라! 시린 논이 진저리처럼 제 은빛 등
타닥타닥 뒤집는 소리
이시영 시인 / 마음의 고향 4 - 가지 않은 길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이 남아 있을까 중학 1학년, 새벽밥 일찍 먹고 한 손엔 책가방, 한 손엔 영어 단어장 들고기름젱이 콩밭 사잇길로 사잇길로 시오리를 가로질러 읍내 중학교 운동장에 도착하면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해에 함뿍 젖은 아랫도리가 모락모락 흰 김을 뿜으며 반짝이던, 간혹 거기까지 잘못 따라온 콩밭 이슬 머금은 작은 청개구리가 영롱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팔짝 튀어 달아나던.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을 다시 한 번 걸을 수 있을까
사람이 그리운 날, 나는 강변에 나가 새들의 산책길을 걸었습니다. 강변에는 갈숲이 무더기로 우거져 있어 그들의 즐거운 서식처였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눈여겨둔 그 중의 한 보금자리를 향해 가만가만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내 발길이 닿기도 전에 참새들은 일제히 갈숲을 차고 달아나며 그 바르르 떨리는 작은 눈동자로 나를 쏘아 보는 것이었습니다. 갈숲 그늘 자리엔 다행히 그들의 온기가 조금 남아 있어 나는 그곳에 짐승인 내 어두운 두 발을 깊숙이 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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