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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시영 시인 / 이야기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6. 26.

이시영 시인 / 이야기

 

 

"밤사이 시영이가 왔다 간 모양이시. 고연놈, 밝은 날 올 것이지 해필이면..."

"아직 초저녁이던디 뭘 그러요. 서울이 여그서 얼매나 머요. 나는 여그 앉아 갸가 들가운데로 훵하니 택시를 타고 와서 꾸벅 절허고 후적후적 걸어 나가는 걸 다 봤"

"......"

"나 앞에는 술을 두 잔씩이나 따라놓았습디다."

"그건, 자네가 여그 온 지 얼매 안 되었으니께 그렇지."

 

아직 이슬도 마르기 전,

간간이 햇빛에 몸을 뒤척이며,

밭둑 위로, 어느 외롭던 세 무덤이 도란도란...

 

*은빛호각, 무늬 , 사이 등 주옥같은 시집을 낳으셨다

 

 


 

 

이시영 시인 / 베스트셀러 시인들을 위하여

 

 

 누구나 다 한때는 순결한 영혼들이었다. 독자들이 그 영혼에 입맞추자 그들은 곧 배부른 돼지들이 되어 부끄러움도 잊고 제 분홍 머리들을 서점의 진열대 위에 올 려놓은 채 호호 웃고 있으니 우리가 이제 싸워야 할 대상은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라 바로 저 상업의 노예들인지도 모른다.

 

 


 

 

이시영 시인 / 공사장 끝에

​​

 

"지금 부숴 버릴까?"

"안돼, 오늘 밤은 자게 하고 내일 아침에 ······."

"안돼, 오늘 밤은 오늘 밤은 이 벌써 며칠째야? 소장이 알면 ······."

"그래도 안돼······."

두런두런 인부들 목소리 꿈결처럼 섞이여 들려오는

루핑 집 안 단칸 벽에 기대어 그 여자

작은 발이 삐져나온 어린 것들을

불빛인 듯 덮어 주고는

가만히 일어나 앉아

칠흑처럼 깜깜한 밖을 내다본다.

 

 


 

 

이시영 시인 / 그네

 

 

아파트의 낡은 계단과 계단 사이에

쳐진 거미줄 하나

 

외진 곳에서도 이어지는 누군가의

필생

 

-시집, 『하동』, 2017, 창비

 

 


 

 

이시영 시인 / 미루나무

 

 

 간밤 눈보라에 시달렸을 미루나무에 오늘은 새로운 까치네 동무들이 가득 찾아와 그 작은 발바닥으로 뱃바닥을 누르고 귓볼을 간지럽히는 바람에 온몸에 웃음을 참지 못한 나무는 새빨갛게 타오르는 서녘 하늘을 향해 껑충한 키를 구부린 채 간들간들 간들간들 웃고 있었습니다

 

 


 

 

이시영 시인 / 정님이

 

 

용산 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 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 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주더니

왜 가 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 섣달 긴긴 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랑잘그랑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 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 나올 것만 같더니

한 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 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 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이시영 시인 / 봄논

 

 

마른논에 우쭐우쭐 아직 찬 봇물 들어가는 소리

 

앗 뜨거라! 시린 논이 진저리처럼 제 은빛 등

 

타닥타닥 뒤집는 소리

 

 


 

 

이시영 시인 / 마음의 고향 4

- 가지 않은 길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이 남아 있을까 중학 1학년, 새벽밥 일찍 먹고 한 손엔 책가방, 한 손엔 영어 단어장 들고기름젱이 콩밭 사잇길로 사잇길로 시오리를 가로질러 읍내 중학교 운동장에 도착하면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해에 함뿍 젖은 아랫도리가 모락모락 흰 김을 뿜으며 반짝이던, 간혹 거기까지 잘못 따라온 콩밭 이슬 머금은 작은 청개구리가 영롱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팔짝 튀어 달아나던.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을 다시 한 번 걸을 수 있을까

 

  사람이 그리운 날, 나는 강변에 나가 새들의 산책길을 걸었습니다. 강변에는 갈숲이 무더기로 우거져 있어 그들의 즐거운 서식처였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눈여겨둔 그 중의 한 보금자리를 향해 가만가만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내 발길이 닿기도 전에 참새들은 일제히 갈숲을 차고 달아나며 그 바르르 떨리는 작은 눈동자로 나를 쏘아 보는 것이었습니다. 갈숲 그늘 자리엔 다행히 그들의 온기가 조금 남아 있어 나는 그곳에 짐승인 내 어두운 두 발을 깊숙이 묻었습니다.

 

 


 

이시영 시인

1949년 전남 구례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수학.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만월』 『바람 속으로』 『길은멀다 친구여』 『사이』 『은빛호각』 『우리의 죽은자를 위해』. 1996년 제8회 정지용문학상. 1998년 제11회 동서문학상, 지훈상, 백석문학상 수상. 창작과비평사 대표이사 부사장,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역임. 한국 작가회의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