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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정권 시인 / 가정입문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6. 26.

조정권 시인 / 가정입문서

 

 

아직도 장맛비가 퍼붓고 있다

얘들아 바깥을 좀 내다 보렴

막다른 골목집 대문 밑에서 여인이

헌 이불 포대기에 핏덩어리를 쏟아놓고 있다

이빨로 탯줄을 끊어 내고 있단다

주위에 아무도 얼씬 못하게

쌍욕을 해대다가 노려보고 있단다

그리고 문지방에 기대 기진맥진해 간단다

얘들아 가서 좀 일으켜 세워드리렴

아비는 너희들에게 너무나 가르치지 않은 것이 많구나

가서 모시고 문지방 안으로 들어오시게 하렴

한 인간이 밖에서 생명을 낳았단다

병원도 아니고 바깥에서 그리고 울고 있단다

갈 곳도 찾지 못한 채

아늑한 침대도 아닌 흙바닥에서

한 인간이 홀로 생명을 낳고 힘들게 홀로 탯줄을 끊어버렸단다

그 탯줄을 젖은 포대기에 싸안은 채

저 문지방을 짚고 넘어오려 하고 있단다

 

 


 

 

조정권 시인 / 새 꽃이 피어 있다

 

 

진눈깨비 하얗게 몰려가 얼어 있구나.

잔뜩 흐려진 마음으로 내려놓은 마음 몇 송이.

덜 마른 물감처럼 젖어있는 하늘.

아무래도 나는 저 무덤 앞에

더러운 지폐로 사들고 온 꽃을 올려놓고 내려온 것 같다.

올려놓았지만 바람이 모로 쓰러뜨린 꽃.

하늘에 성냥불 한번 댕기지 못하고 공회전하다 멈춘

연소불량의 하루 혹은 젊음

빨리 타기를 기다리며

아니 빨리 타주기를 기다리다가

내 젊음은 무참하게 장미꽃들을 꺾으며 휘날려버렸다.

침엽수림 안쪽에서 나무들의 파안대소

저 하늘의 박장대소.

누군가 또 꽃 조용히 내려놓고 내려간 무덤에

방금 따온 듯한 눈물

새로 피어있다. 내 두 손이 너무 더러워져 보인다.

 

-시집 <떠도는 눈물>에서

 

 


 

 

조정권 시인 / 양파

 

 

옷을 잔뜩 껴입고 사는 여자가

모임에 나오곤 했었지

어찌나 많은 옷을 껴입고 사는지

비단을 걸치고도 추워하는 조그마한 중국여자 같았지

옷을 잔뜩 껴입고 사는 그 여자의 남편도

모임에 가끔 나오곤 했었지

남자도 어찌나 많은 옷을 껴입고 사는지

나은 배가 더 튀어나온 뚱뚱한 중국남자 같았지

그 두 사람 물에서 건지던 날

옷 벗기느라 한참 걸렸다네

 

 


 

 

조정권 시인 / 백지 (白紙) 3

 

 

방황하는 이 옆에서는 아무 질문도 하지 말 것

침묵으로서, 그에 합당한 예의를 갖출 것

그 옆에서는 다만 공손함으로써 그 영혼에 합당한 예절을 갖출 것

요란스러운 화장기를 벗길수록 인간의 영혼이란

고통,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 것

살아온 날들과 또 살아야 할

수많은 날들의 두려움에 대하여

지상至上의 위안이란 마치 간섭과도 같은 것

그것은 또한 내 스스로에 행하는 강요와도 같은 것

때때로 침묵함으로써,

이 시간에 나는

마음과 영혼과 빈손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을 느끼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결국 뼈를 찔리는 일이 아닌가

뼛속 깊이 찔리는 그 실감나는 시간의 축적인 영혼

흔히 바쁘게 지나치다가도 유정한 눈길을 주다보면

백지는 비어있음으로써 충분한 불을 켜고 있다

 

 


 

 

조정권 시인 / 약리도(躍圖)

 

 

물고기야 뛰어 올라라

최초의 감동을

나는 붙잡겠다

 

물고기야 힘껏 뛰어 올라라

풀바닥 위에다가

나는 너를 메다치겠다

 

폭포 줄기 끌어내려

네 눈알을 매우 치겠다 매우 치겠다

 

-시집 『허심송』, 영언문화사, 1985.

 

 


 

 

조정권 시인 / 처방전

 

 

뭉게구름 90일분

시냇물 소리

90일분

 

불암산 바위

쳐다보기 90일분

 

빈 껍데기 달

90일분

 

귀하의 삶은

의료혜택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조정권 시인 (1949~2017)

1949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 영어교육과 졸업. 197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허심송』 『하늘이불』 『산정묘지』 『신성한 숲』 등.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창과 석좌대우교수 역임. 녹원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2017년 68세 일기로 생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