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권 시인 / 가정입문서
아직도 장맛비가 퍼붓고 있다 얘들아 바깥을 좀 내다 보렴 막다른 골목집 대문 밑에서 여인이 헌 이불 포대기에 핏덩어리를 쏟아놓고 있다 이빨로 탯줄을 끊어 내고 있단다 주위에 아무도 얼씬 못하게 쌍욕을 해대다가 노려보고 있단다 그리고 문지방에 기대 기진맥진해 간단다 얘들아 가서 좀 일으켜 세워드리렴 아비는 너희들에게 너무나 가르치지 않은 것이 많구나 가서 모시고 문지방 안으로 들어오시게 하렴 한 인간이 밖에서 생명을 낳았단다 병원도 아니고 바깥에서 그리고 울고 있단다 갈 곳도 찾지 못한 채 아늑한 침대도 아닌 흙바닥에서 한 인간이 홀로 생명을 낳고 힘들게 홀로 탯줄을 끊어버렸단다 그 탯줄을 젖은 포대기에 싸안은 채 저 문지방을 짚고 넘어오려 하고 있단다
조정권 시인 / 새 꽃이 피어 있다
진눈깨비 하얗게 몰려가 얼어 있구나. 잔뜩 흐려진 마음으로 내려놓은 마음 몇 송이. 덜 마른 물감처럼 젖어있는 하늘. 아무래도 나는 저 무덤 앞에 더러운 지폐로 사들고 온 꽃을 올려놓고 내려온 것 같다. 올려놓았지만 바람이 모로 쓰러뜨린 꽃. 하늘에 성냥불 한번 댕기지 못하고 공회전하다 멈춘 연소불량의 하루 혹은 젊음 빨리 타기를 기다리며 아니 빨리 타주기를 기다리다가 내 젊음은 무참하게 장미꽃들을 꺾으며 휘날려버렸다. 침엽수림 안쪽에서 나무들의 파안대소 저 하늘의 박장대소. 누군가 또 꽃 조용히 내려놓고 내려간 무덤에 방금 따온 듯한 눈물 새로 피어있다. 내 두 손이 너무 더러워져 보인다.
-시집 <떠도는 눈물>에서
조정권 시인 / 양파
옷을 잔뜩 껴입고 사는 여자가 모임에 나오곤 했었지 어찌나 많은 옷을 껴입고 사는지 비단을 걸치고도 추워하는 조그마한 중국여자 같았지 옷을 잔뜩 껴입고 사는 그 여자의 남편도 모임에 가끔 나오곤 했었지 남자도 어찌나 많은 옷을 껴입고 사는지 나은 배가 더 튀어나온 뚱뚱한 중국남자 같았지 그 두 사람 물에서 건지던 날 옷 벗기느라 한참 걸렸다네
조정권 시인 / 백지 (白紙) 3
방황하는 이 옆에서는 아무 질문도 하지 말 것 침묵으로서, 그에 합당한 예의를 갖출 것 그 옆에서는 다만 공손함으로써 그 영혼에 합당한 예절을 갖출 것 요란스러운 화장기를 벗길수록 인간의 영혼이란 고통,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 것 살아온 날들과 또 살아야 할 수많은 날들의 두려움에 대하여 지상至上의 위안이란 마치 간섭과도 같은 것 그것은 또한 내 스스로에 행하는 강요와도 같은 것 때때로 침묵함으로써, 이 시간에 나는 마음과 영혼과 빈손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을 느끼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결국 뼈를 찔리는 일이 아닌가 뼛속 깊이 찔리는 그 실감나는 시간의 축적인 영혼 흔히 바쁘게 지나치다가도 유정한 눈길을 주다보면 백지는 비어있음으로써 충분한 불을 켜고 있다
조정권 시인 / 약리도(躍圖)
물고기야 뛰어 올라라 최초의 감동을 나는 붙잡겠다
물고기야 힘껏 뛰어 올라라 풀바닥 위에다가 나는 너를 메다치겠다
폭포 줄기 끌어내려 네 눈알을 매우 치겠다 매우 치겠다
-시집 『허심송』, 영언문화사, 1985.
조정권 시인 / 처방전
뭉게구름 90일분 시냇물 소리 90일분
불암산 바위 쳐다보기 90일분
빈 껍데기 달 90일분
귀하의 삶은 의료혜택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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