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봉 시인 / 바다
나는 던진다, 던진다, 던진다 태양과 돌, 돌은 날개를 펴고 날아가 바다를 한 마리 새로 만들고 태양은
불화살을 쏘쏘쏘쏘쏘쏘쏘 아
바다를 뜨겁게 분노시킨다 불끈, 화가 날 때의 무서운 표정 근육은 단단하게 수축되면서 강철로 된 기선과 물고기들을 구름위로 날려버린다
바바바바바 바바바 바
다
하재봉 시인 / 사쿠라 땅게라
물에서 왔다고 했다. 그녀의 집은 비 그친 뒤 투명한 날 남산타워의 피뢰침이 바라보아도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했다. 늘 젖은 나무냄새가 나는 그녀의 사타구니에서는 해방된 벚꽃이 피고 나는 무지개의 일곱 기둥을 차례로 박으며 땀이 식을 때까지 버섯 같은 둥근 지붕 밑에 머물러 있었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내 패밀리 네임은 하, 물 하자야. 한자로 삼수변이 앞에 붙어 있지. 나도 물에서 왔어. 개울물인지 섬진강인지 서해바다인지는 모르지만 나도 물 건너 가본 적이 있지 거기서는 내가 사꾸라야. 내 사타구니에서도 끝이 길고 뾰족하며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는 왕벚꽃 잎을 그녀는 볼 것이다 껍질이 벗겨지면 그녀의 입장에서는 내가 사꾸라 땅게로다 꽃잎의 붉은 열기로 하늘이 타오르고 재가 된 지평선 쪽으로 나무들은 죽은 뿌리를 뻗는다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내 걸음에는 흔적이 없다 함께 걸으면서 벚꽃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그녀는 두 손으로 자기 입을 막고 자기 눈을 지운다 꽃비 그친 뒤 나는 다시 검은 물을 건너갈 거겠지만
하재봉 시인 / 저녁산책
갈수록 저녁산책 시간이 빨라지고 있다. 가을이 오기 때문이다. 나는 맨발로 서회귀선을 밟고 저녁 해가, 지평선위에 사형수의 목처럼 걸려있는 것을 바라보며 산책을 시작한다.
읽고 있던 탁발승려의 시집은 나무책상위에 접어놓았다. 이제 곧 이교도의 사원위로 불타는 날개 이끌고 까마귀떼 돌아오리라 황혼의 종이 울려 퍼지면 단식일의 황금촛불이 켜지리라
만가를 부르며, 언젠가는 우리 모두 가야할 곳으로 돌아가는 구름의 장엄한 행렬 뒤 초저녁 별 개밥바라기 피어오를 때 새들은 둥지속으로 돌아가 알을 낳는다. 나도 새가 되고 싶었다. 그녀들이 불러만 준다면 그 곁으로 날아가 꿈꾸는 알을 낳고 싶었다.
새들은 굽은 부리로 하늘벽을 쪼아 일곱 개 푸른 별을 만들어가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말울음소리 들으며 나는, 내 긴 그림자를 밟고 서회귀선 빈 집으로 돌아온다.
-시집 『안개와 불』 민음사
하재봉 시인 / 모래의 춤
나는 맨발 내가 딛는 세계는 단단하지 않다. 언제 허물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잠시도 춤을 멈출 수는 없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땅 위에 서 있다. 그 무게 때문에 땅이 내려앉는 것은 아니다. 저렇게 가벼운 육체 속에 빈 틈 없이 꽉 차 있는 욕망
하늘은 점점 더 멀어진다. 땅은 수많은 모래들로 분열된다. 머리카락은 철사줄처럼 녹슬어가고 썩은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들어온다.
그대가 균형을 잃는 순간 세계는 오른쪽으로 15도 기울어진다. 내가 왼쪽으로 15도 몸을 기운다면 우리는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너와 내가 팽팽하게 균형을 잡는 춤처럼?
우리가 함께 맞잡은 손 우리가 서로의 등에 손바닥을 대고 끌어당길 때 가까워지는 것은 가슴이 아니다. 그대 심장 뛰는 소리가 태양을 뜨게 만든다.
하늘은 활처럼 휘어져 늘 마음 변하는 구름과 수다스러운 새들과 별의 알들을 품어 안고 아직 처녀인 지평선처럼 시위를 떠날 준비를 한다. 나무들의 머리카락은 황금의 언어로 반짝인다. 어두워질 때만 사막인 죽음의 모래들은 슬픔을 증발시키며 내부에서부터 단단해진다.
아니야, 이건 어쩌면 신기루일지도 몰라. 내 힘차고 빠른 두 발로 지구를 자전시켜야 돼.
저와 함께 춤추시겠습니까?
하재봉 시인 / 일식
당신 가슴 어느 모서리에 새벽이슬 혹은 젖은 우슬초 다발로도 다스릴 수 없는 불씨 몇 겁이나 숨겨져 있었다니요 나는 모릅니다 충만한 눈빛 아래 해바라기 밭 개미집을 들쑤시고 강의 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맑은 피 흐르는, 하늘가 미끄러운 자갈 열어 별들의 개울에서 버림받은 가재 징그러운 다리를 잡는 동안에도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며 어머니 당신의 정갈한 가슴 독 묻은 집게발로 파먹는 자식 남모르게 있을 줄이야
하재봉 시인 / 빈혈
나는 피가 없다 밤이 되면 내 피는 모두 어디로 가는가 가슴을 쓸어내리면 하얀 버즘 마르고 마른 눈물, 별이 뜨고 저녁과 함께 나는 가고 싶다 너의 금 간 벽, 파랗게 떠는 돌들의 이마 내 몸을 빠져나가는 눈부신 빛이, 나무의 끝에 닿는 순간 나의 세계는 변화할 것이다 어쩌면 무덤 위로 차가운 태양이 솟구치고 다시 또 몇몇 사람은 누울 자리 찾아 땅 밑으로 내려갈 것이지만 빛의 허리를 부여잡고 그래, 울지 말자 꽃다운 내 나이 봄이 오고 있으니 죽어도, 너의 문 앞에서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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