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령 시인 / 홍어
접시에 삭힌 홍어가 놓여있다
뭉뚱그린 시간의 퇴적층까지 맛보기위해 나는 오도독 뼈째 홍어를 씹었다 젓가락으로 모래톱과 협곡까지 헤집다가 덜컥 코를 움켜잡았다 잊고 있던 생의 주저흔 코끝에서 솟구쳤다 홍어는 뼈 속까지 베인 파도의 가혹을 쟁이고 너울 해넘이까지 일렁이는 등대의 눈물과 어둠 파고드는 뱃고동 울음소리 부표의 목적 없는 표정까지 놓치지 않고 저미듯 체취에 세월의 결을 새겨 넣었을까 문득 심연의 모난 것들 들추면 왜 슬픈 기억에선 매캐한 거름 냄새가 나는지 썰물에 밀려 어스름마저 와락 안겨온다 나는 뻘배처럼 밀고 나가 머나먼 바다로 나간 것 같았는데 밀물처럼 쓸려가다 짐짓 돌아보면 여전히 그 자리 다시 홍어가 놓인 접시에 빠졌다 어제의 부활이 오늘이라는 믿음 내일이면 지금 이 순간도 홍어처럼 저렇게 삭힐수록 맛이 깊어지리라는 확신 엉거주춤 우왕좌왕 생각이 발효 중인 접시가 오래된 기도처럼 나를 붙잡고 있다
-계간 『시산맥』 2024년 겨울호 발표
이령 시인 / 그림자 너머 그림이 있는 카페
시간이 전소된 이곳에선 느닷없이 풍경으로 남을 것 벽에 걸린 액자 속 새와 액자를 막 벗어나려는 새, 꽃보다 예쁜 꽃병, 장단이 어긋난 음악, 오롯이 배경일 것 탁자 너머로 불필요한 애드립처럼 어색한 표정의 너와 내가 있다 설핏 암막커튼 자락에 보드라운 햇살고물이 묻어있다 그림 너머 그림자, 그림자 속 그림, 안팎 모조리 생의 배태인가 시간은 누구도 조율할 수 없는 풍경 블루스로 때론 폴카로 내밀한 서사를 품고 있다 액자 속 새가 날개를 결단코 펴지 않는다면 액자 밖 새가 날개를 마저 거두어들이지 않는다면 꽃보다 예쁜 꽃병도 낯설지 않다 그림자 짙은 그림처럼 우리의 이별은 내가 속으론 울면서 웃음으로 재연하고 싶은 가뿐하게 건너가는 풍경일까 예고 없이 방문한 시간의 여행 지 이별은 너와 나의 표정으로 완성되는 무대 정해진 연극은 없기에 나는 내 표정을 연기 한다
-웹진 『문장』 2024년 9월호 발표
이령 시인 / 13월의 미장센 ㅡ미스킴라일락
우리 동네 울음의 매파는 미스킴라일락이라네 부릉부릉 스물 하나 아니면 서른셋도 아닌데 길은 나래치고 이정표는 범람 했네 담장은 무너지고 밀어는 자주 울타리를 도발 했네 식은 커피처럼 근근이 속삭이거나 번진 마스카라가 되거나 밤이 낮이 되어 여자는 티켓 만큼 나풀나풀 커피를 팔았네 살기위해 사랑을 가장하며 커피 프리마 무늬 같은 브라우스 앞섶을 풀고 또 풀었네 쌀 수매 철 젖무덤만한 최영감의 지갑을 서리한 미스킴이 도망간 날 복덕방 허영감도 금은방 박영감도 덧대어 울었네 농협 너머 수정다방은 남겨진 둥지만큼 스산하고 울음의 기우는 높쌘구름처럼 두터워서 스물 하나도 서른셋도 아닌 동네 영감님들 미스킴미스킴 꺼억꺼억 부르며 이생을 등졌네 대부분 떠나간 것들은 돌아올 거라는 약속을 남겼는데 믿지 못해 믿는 거라고 미스킴 라일락 향기보다 치명적인 치명(治命)만 남겼네 깃털처럼 묵직한 사랑으로는 그 누구도 철새의 행방을 가늠하지 못 했네
계간 『아토포스』 2023년 여름호 발표
이령 시인 / 건달바
결국에 나는 수미산 자락에서 칠보 무더기를 가지고도 밥을 빌어먹는 사람이다
세상이 무더기라면 세상이 없듯 별이 빛나는 것이 아니라 별이 그냥 그기에 있는 거다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고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는 별들의 공복을 이 적멸의 허기를 어떤 비유로 달래야 하나
일단 반짝이는 것은 내가 아니다 별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셈을 치며 나는 자주 별자리를 탐했지만, 정작 빛나는 것들의 배후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내가 아사(餓死)하진 않았다 궤도를 서성이다 사라지는 별들의 부스러기가 고봉으로 진설되는 밤, 내일 죽은 내가 오늘을 앓으며 어제 다시 태어 날것이다
없는 내가 자꾸만 커져가는 나를 다독이는 밤, 우렁우렁 깊어간다
계간 『아토포스』 2023년 여름호 발표
이령 시인 / 덫
난 사각의 틀 앞에 놓여있다 붇기로 자릴 옮긴 알콜은 그와 내가 대면하는 아침의 위력을 보여준다 거울은 보고자 하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담아내는 영사기,
머릴 감는 동안 그는 염장 미역처럼 푸른 필름으로 풀어진다 샤워 콕에선 파도 소리 들리고 그는 비누거품으로 자라나 난 눈이 맵다
사각의 틀에 들 때마다 내 눈은 선명하다 그도 투명한 물속을 숙영하는 내 머리카락을 보고 있다 헤어드라이기 속에는 아직 그가 남기고 간 더운 입김이 서려있다
물의 무게가 덜어질수록 무겁게 달려드는 그는 사각의 시간에 잠식된 한편의 비루飛樓
그 비릿한 바다 냄새 가시지 않는
이령 시인 / 기하학적 사랑
a. 일이사분면에 애인들을 열거 한다 머리 없는(둘) 심장 둘인(셋), 다리 짧은(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의 머리를 가르자 해가 없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심장을 파고들자 해가 무수하다 심장을 파며 머리를 가르고 한 점에서 절뚝이자 우리 사랑은 수렴되거나 발산 된다
b. 삼사사분면에 꽃을 그린다 색 바랜(하나), 새순 핀(셋) 흐드러진(둘)
하나가 다른 하나의 색을 거부할 때 해가 진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가슴에 새순을 피워내자 해가 뜬다
색 바랜 후 새순 돋고 꽃가지 늘어지면 우리 사랑은 답이 없거나 무수한 극과 극에 닿는다
겹치거나 평행을 반복하다 결국 원점을 향하는 우리 사랑은 무한대다
이령 시인 / 토르소
플라타너스를 보았다 물구나무선 나무 그림자 수몰된 달의 내력, 그 오래된 기억을 깁고 있을까 바람이 호수를 말아내면 분산된 시간들이 퀼트처럼 하나가 된다 한 번도 자신인 적 없던 숲에 가린 생을 떠올리며 플라타너스, 알몸으로 그 바람을 다 맞고 서 있다 오래전, 품어온 달무리 바람의 힘으로 나무를 따라 흐른다 물결은 달의 힘을 신봉하지만 달은 소리를 만든 적 없기에 명상에 잠긴 나무 그 아래, 나도 회향(廻向)의 맘, 머리 숙여 가져보는 것이다 달은 어느새 나무 그림자 속에 나를 베끼고 있다
이령 시인 / 언젠가는 서랍
덜거덕거리는 서랍은 아름답습니다
당신은 없고 나만 남아 오롯한 심장을 칸칸이 숨겨 둔거죠 슬픈 눈과 닿을 땐 더러 덜컹입니다
고해성사처럼, 거룩한 형식은 사양합니다 가볍고도 가벼운 서랍이 좋습니다
리드미컬하게 스텝바이스텝 진중한 가벼움으로 인사 합시다
서랍을 열면 길이 됩니다. 그 길목에 아스라이 서 있는 우리, 심장이 눈처럼 수북하게 쌓이는 날 지울 수 없는 첫 발자국처럼 꾹꾹 말의 휴지(休止)가 되는 서랍은 기쁜 안녕이 됩니다
지우려 애쓰지 말아요 그냥 덜컹이면 돼요 채울수록 가벼워지는 서랍도 있어요. 가벼운 이별과 더 가벼운 흔들림
속도를 벗어나 서랍을 열자고요 가끔 모른 척 덜커덩 갇히기도 하고요 심장이 서랍을 열면 눈 감고도 읽을 수 있고 서랍의 품도 자꾸 깊어 질 테니까요.
불현 듯 가끔 만납시다 미끄러지듯 아름다운 사람,아니 서랍들 가장 얇지만 가장 묵직한 흔적 속에 가까스로 서식하는 미쁜 비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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