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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윤학 시인 / 청소부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6. 27.

이윤학 시인 / 청소부

 

 

누워 있는 것도 벽이었다. 출근길 서둘러 밟고 온

보도블록에도 무늬가 있었다. 단색세포처럼 또박또박

놓여 있었다. 밟히면 들고 일어나기도 했다. 기우뚱

거리며 빗물을 토해 내기도 했다

 

모든 것은 줄지어 서 있었다.

길을 만들며 스스로 자라야 했다

 

한번쯤 앞서고 싶은 길

바람을 견딘 만큼 몸으로 주름이 잡혔다.

지워지는 혈관을 찾아 나는 불안하게

흔들려야 했다

 

햇살은 구름 사이로만 쏟아졌고 아이들은 티눈처럼

자라 있었다. 엉킨 뿌리를 들고 일어났다

태풍이 겹겹으로 껴입은 주름을 더듬고 갔다

그리고 바람이 통 없는 날 고개를 숙여야 했다

 

아이들은 조금씩 흔들릴 때 아름다웠다.

껴안은 모든 것들 속에서 너희들은 동티처럼

부활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 소문 없이 떨어질

나를 위해 남아 있어야 했다. 깨끗한 너희들,

 

밟히는 족족 주름을 벗고 탄생하는 은행알들

 

 


 

 

이윤학 시인 / 유리컵 속으로 가라앉는 양파

 

 

유리컵에 물을 붓고

싹이 나기 시작한 양파를

올려놓았다. 양파의 하얀 뿌리들,

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파란 양파의 머리카락들

꿈을 꾸고 있는 머리를 보는 듯했다.

꿈은 갈수록 흐릿해지는 것이었다.

파란 양파의 머리카락들

TV 화면을 가리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곧 잘려나갔다.

양파의 발들은 바닥에서 엉켜

둥그런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꿈을

다 꾸어버린 머리통인 양파 속은

텅 비어있었다. 유리컵은

뿌옇게 변해있었다.

 

가벼워진 양파,

자신의 둥지 속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시집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에서

 

 


 

 

이윤학 시인 / 거울

 

 

어디,

자신보다 더 불쌍한 인간이 또 있을까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동자

 

거울 속으로 문이 열리고 그는

급히 거울 속에서 나와

눈물을 감춘다

 

다시, 알 수 없는 눈동자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생각들을 다

누구에게 바칠 수 있을까.

 

 


 

 

이윤학 시인 / 여름의 한낮

-오동나무 아래

 

 

 

오동나무 밑에는 평상이 놓여 있다

평상 옆에는 지팡이가

여럿 기대져 있다, 노인들이

입을 벌리고 자고 있다

 

털 난 벌레가

꿈틀꿈틀 기어가고 있다

 

평상 위에는 부채가 놓여 있다

부채는 시들지 않는다, 쩍

갈라진 수박 반 쪼가리

 

저 수백 장의 오동나무 이파리

부채는 시들지 않는다

푸른 부채, 너무 큰 부채들 위에

꽃이 피어 있다

 

노인들, 가끔 입맛을 다신다

얼마나 많은 순간들이 겹쳐

지나간 것인가, 그리고

꽃이 시든다는 것을 얼마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가

 

더 높은 곳으로

저 꽃들은 바쳐진다!

 

오오, 입을 다물어

씨를 만들어내는

지독한 순간들, 만난다

 

햇빛이 잠깐 입 속을 스쳐간다

입 속의 금이 번쩍 빛난다, 저

평상 위의 그늘은 끝없이 물결친다

 

 


 

 

이윤학 시인 / 화살

- 생선구이

 

 

가죽이 터진 채 굳게 입을 다물고

버티고 있다 저 통통한 시체의 과거,

우리의 입맛은 과거를 동경하고 있다

저 놈도 언젠가, 물 속에 버려졌을 것이다 버림받고 떠돌다

무엇인가에 놀라 뜨인 눈이 쉽게 감기지 않는다

아픈 곳에 눈길을 줄 수도 없는 물고기 한 마리가

놀라움에 약한 가죽을 열고 괴로운 비밀의

하얀 속살을 불쑥 토해냈다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은

눈부심의 속살, 우르르 달려드는 눈길......

 

김이 빠져 나오는 찢어진 가죽, 고통은 참을 수 없는 뜨거움인가!

몸을 감싸주던 체온이 사라진 후

동그란 물고기의 한쪽 눈이 남는다

놀라움에 조금씩 가죽을 찢었을, 잠들지 않는 눈

나는 얼마나 많은 저 눈깔을 빼먹었던가

 

깊은 물 속을 헤쳐온 물고기의 가시는 앙상하게

꼬리를 향하여, 무수히 활처럼 휘어져 있다

 

 


 

 

이윤학 시인 / 버려진 식탁

 

 

언젠가 식탁을 하나 샀다. 꽃병

속에 꽂혀 있던 꽃들이 시들어

몇 차례 버려졌다. 그리고

꽃병 속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 의해 꽃병은 엎질러지기 시작했다.

 

처음, 의자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무슨 얘기를 나누었던가.

식탁은 저녁을 위해 차려진 적이

있었다. 의자들은 이 방

저 방으로 흩어졌다. 벗어놓은 옷이

뒤집혀, 의자 위에 쌓였다.

 

한 방에서 일일 연속극이 시작되고

한 방에서 흘러간 노래가 흘러나왔다.

 

식탁 위엔 신문지와 영수증, 플라스틱 용기와 비닐봉지가

올려졌다. 한때는, 그곳에서 양파를 기른 적도 있었다.

양파 줄기는, 잘라내자마자 다시 자라났다. 점점 가늘어져

창문에 가 닿을 듯했다.

 

말라비틀어진 양파 줄기 위에

더 많은 신문이 던져졌고,

영수증과  플라스틱 용기와 비닐봉지가 쌓여갔다.

        

검은 비닐 봉지 속에서,

많은 과일들이 썩어나갔다.

 

어느 날 저녁, 그것들을 들어냈다.

몇 해 전에, 야유회에 가서 찍은 사진이 나왔다.

오랫동안 유리 밑에 깔려 있었으나, 놀랍게도

사진 속의 얼굴들은 잔디밭에 앉아 웃고 있었다.

 

 


 

이윤학 시인

1965년 충남 홍성 출생.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먼지의 집』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 『그림자를 마신다』 등, 산문집 『환장』, 장편동화 『내 새를 날려줘』 『왕따』 등. 김수영문학상, 동국문학상 수상. 현재 '시험' 동인으로 활동. 2017 제17회 지훈상 문학부문. 2003 제22회 김수영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