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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융희 시인 / 공동체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6. 25.

천융희 시인 / 공동체

 

 

 직감이 예감을 앞지를 때 오늘의 한가한 틈으로 걷잡을 수 없는 내일이 몰려든다 도서관에는 아직도 불이 켜져 있고 물론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 각각 도달 지점에 대하여는 불문율이다.

 

 슬리퍼 끄는 소리에 자동문이 여닫히고 점점 사라지는 곳

 야생의 의자는 농후한 자세로 추론적이고 손이 닿지 않는 책들이 벽의 사면을 붙들고 있다 정리 정돈이 철저하고 말하자면 장식장 같고 거듭 말하자면 각자 원하는 우물이 천차만별이다

 

 강박에 끼워 맞춘 저들의 몸 저들의 목은 둥글다 못해 꺾여 있다 턱을 괴거나 뇌섹을 위해 멍 때리는 표정엔 사뭇 얼굴이 드러나지 않고 구석진 자리는 세 번 네 번째 우물을 파는 삽들의 붉은 눈동자

 

 그새 한쪽 뺨이 두레박을 내리듯 바닥을 부딪고 올라온 얼굴에는 물길을 만난 흔적이 뚜렷하고 무력감에 시달리는 무한한 밤이 되레 발버둥을 치는 밤

 

 궁리하는 밤 내몰리는 밤이다

 

- 월간 <현대시≫ 2022년 1월호, 「신작특집」에서

 

 


 

 

천융희 시인 / 붉은 양파는 붉다

 

 

양파 한 조각 입술에 물고 멀찍이 양파를 까다,

알겠다

갈 때까지 가보지 않아도 진작 알겠다

 

삶, 때론 물컹해 보여서

 

열 손톱 세워 한 겹 또 한 겹 벗겨 낼 때마다

한 생이 통째 눈물 나도록 맵고 아린 것을

궤적이 온통 자줏빛으로 물드는 것을

 

도마 위 붉은 양파 하나

칼을 지나자 화악 길이 파문 진다

 

붉은 양파는 붉어서

가둔 슬픔이 치밀한 형식을 갖추고

겹 가장자리마다 붉게 매달린 궤도의 단면

 

짓무른 눈가 훔치다 보면

아직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절망의 물길이

곳곳에 은폐되어 있다는 걸

 

겉껍질에 싸인 헐거운 저녁 아래

궤도 이탈을 빙자한 사람들의 발길이 분분하다

 

과감하게 또는

가감 없이 내딛는 또 다른 한쪽 발

 

 


 

 

천융희 시인 / 피의 유전자

 

 

미지근한 속엣말을 삼키고

그림자놀이하느라 딱 절반을 소진했다

 

장소 불문하고 무료(無料),

사는 게 무료(無聊)한 날은 무한리필도 가능했다

 

뭉그적거리다 깔고 앉기 일쑤여서

넋 놓기 좋은 날도 더러 있었다

 

가끔 내동댕이친 날은

소리 없이 등을 돌려 밤새워 그림자 본뜨기

자칫 죽을 맛이면

농축된 검은 피의 유전자를 끌어안고

생의 바깥 염탐하기

 

검은 그림자에도 뼈가 있어

욱신거릴 때면 눈물이 옹골찼다

 

더욱 명료해지는 슬픔 따위에 떠밀려

한동안 잠수를 탈 때마다

굴절된 그림자를 건져 올리느라

여러 뜰채가 동원되기도 하였다

 

말끝이 흐려지고 모호한 표정의 당신

 

눈코 뜰 새 없이 무료한 날의 당신도

알다시피 무료다

 

 


 

 

천융희 시인 / 국경의 나비

엎드린,

그녀의 목덜미로 나비 한 마리 따라와

염료가 채 아물지 않은 상처를 파르르 떨며…

압정 눌린 듯 고정된 몸통에는 잉크 빛이 선명하다

 

경계를 넘어 당도한 은신처에는

한낮에도 희미한 전구가 흔들리고

별반 다르지 않은 점포 벽면에는

두 발의 반사구가 화보처럼 붙어있다

 

발바닥에 뻗친 무수한 혈맥들

강약을 조절하는 손마디는 마치 의식을 치르는 듯 엄숙하고

굳게 다문 그녀의 입술은 끝내 암묵적이다

 

이국의 언어가 간간이 어깨너머로 오가며

접었다 폈다 반복하는 사이

지친 날개를 털며 나비는 어디쯤 날고 있을까

 

언뜻, 타투(tattoo)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비애가

그녀의 손등을 적실 때

꽃 진 계절을 끌고 햇살 속으로 무작정 번지는

나비 한 마리

 

『시작』 (2017년 여름호)

 

 


 

 

천융희 시인 / 메신저

 

 

예고 없이 초대된 그룹 입력창에

일면식도 없는 이름들이 열거되어 있다

 

뜬금없이 편집 정렬된 사람들은

각자 보안을 유지하느라

거리 두기에 힘쓸 때

아랑곳없이 수신되는 링크들

카톡•카톡•카톡…

 

건조함을 견디지 못한 몇은

소리 없이 나가거나

연이어 몇은 소환되어

변명할 겨를도 없이 재편집된다

 

실시간 정보를 유기당하는 방들

 

우리는 각자

간편 모드를 선호하며

분리된 삶의 목록을 도모하느라

삶을 탕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동안 소리를 억누른다

 

관리자의 소홀한 틈을 기웃거리며

-나가기

타이밍을 즐기는 중이다

 

 


 

 

천융희 시인 / 섬

-논개바위

 

 

닿을 듯 아니 닿을 듯

 

정녕 아니 외로운 듯

 

진주에 오시면 남강

그 강가를 따라 잠시 머물러 가시라

 

요지부동(搖之不動)

 

충혼이 역사로 각인된

섬 하나 부디 읽고 가시라

 

물결의 사면을 두르고

직립으로 써 내린 의로운 견고

 

닿을 듯 아니 닿을 듯 정녕 아니 외로운 듯

 

 


 

 

천융희 시인 / 함구증

 

 

 잔가지가 출입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올해도 여지없이 아파트 관리원은 절단기에 시동을 걸었다 새 한 마리 바람 한 점 앉을 자리도 남겨두지 않고 목련 한 그루를 처단하고 사라졌다 몸통만 섰다

 

 시퍼렇게 멍든 하늘엔 언제부턴가 비행기조차 드물게 날았다

 

 아무도 관여하지 않았고 당연히 봄은 그렇게 오고 있었다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트렁크에서 빈 관을 꺼내 들고 아파트 안으로 서슴없이 들어갔다 출입통제선이 펄럭였으며 사람들은 마스크로 안면을 가린 채 함구했다

 

 갈수록 도무지 아는 게 없다고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두려움마저 사라져 가고 있다고 단지 역대 최다를 기록하고 있다고 결핍과 사투를 벌이는 중이라고

 

 모든 것이 급성으로 확장되어 갈 때 통증처럼 꽃눈이 트고 있다고

 

-<미래시학> 2022-여름(41)호

 

 


 

천융희 시인

1965년 경남 진주 출생. 2011년 《시사사》로 등단. 시집 『스윙바이』. 경남일보 <천융희의 디카시로 여는 아침> 연재 중. 2019년 제2회 유등작품상, 2020년 이병주경남문인상 수상. 경남문인협회, 창원문인협회, 경남시인협회, 한국시인협회 회원. 계간 《시와경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