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오유정 시인 / 수목장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6. 24.

오유정 시인 / 수목장

 

 

산중턱 참나무 아래 아버지를 묻는다

내 손 놓지 못하던 情 끊어내려

평평한 무덤 힘껏 두드리면

가늘고 질긴 행살 툭툭 끊긴다

그 진동에 땅이 깨어나고 나무뿌리 흔들린다

참바람 견디느라 돌돌말린 잎들

무덤 위로 모여들고

나는 그들의 둥근 몸 다시 밟으며 찾아오리라

표석에 새겨진 이름자 따라가면

순간 점화된 영상 속으로 가로지르는

색 바랜 가죽점퍼 핏발 선 눈동자

축 처진 어깨가 목발에 의지한 채 걸어가고 있다

삼월의 서툰 발자국에 겨울이 서둘러 녹으면

겨우내 아버지의 기억 빨아들인 참나무

발깃발깃 봄물 오르기 시작하고

지난 기억들 낮달처럼 점점 희미해질 때

나무둥치 밑 물관에서 물길 트는 소리 들리리라

슬픔으로 감전되기 전

성한 손으로 아버지 가슴쯤에 수간주사樹幹注射*를 꽂는다

헛가지 키우던 아픔 이젠 알 것 같다

단단한 겹눈하나 둘 터지고

예전에 알지 못했던 사랑의 옹이가

입으로 빨아내다만 종기처럼 살 속 깊이 머물러 있다

 

*수간주사樹幹注射 : 나무에게 주는 영양주사.

 

 


 

 

오유정 시인 / 레일 위를 달리는 나이테

 

 

막차가 지붕 위를 밟고 지나가면

그녀의 꿈길에도 나란히 레일이 놓인다

열차가 지난 뒤 레일은

날카로운 이빨 번득이며

열차가 싣고 가버린 몸의 나이테를 쫓는 중이다

걸음 옮길 때마다 척척

발밑에 놓이는 무거운 짐들

뒤따르는 길도

자글자글 울음 그치고

측백나무 도열하여

그녀의 발목 삐걱거리는 소리 듣는다

사라져버린 열차의 뒷모습

등에 지고 온 세월의 침목들

레일 위에 하나씩 던지며 철길 걸어가면

무게를 견디느라 굽었던 허리가

발걸음 옮길 때마다 조금씩 가벼워진다

시간의 공간 속에 멈춰버린 나이테

갈라지고 헐거워져 버려진 침목처럼

공허감으로 두려운 몸

이제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는 그녀,

철길에 앉아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레일을 바라보면

올록볼록 철로가 그녀 몸에 박힌다

새벽녘 가로등 불빛이

가느다란 호흡 끝에 매달려 있다

 

 


 

 

오유정 시인 / 엄마의 돌담

 

 

 어느 초여름이었던 것 같아, 함께 자라던 돌덩이 몇몇 있었어 햇살에 꽃송이 두드러지듯 하나 둘 늘더니 담장 하나 내게 선물 했어

 가끔씩 고만고만한 철부지 욕망에 시달리곤 했어 철새가 될 순 없을까 돌담에 부리를 닦고 떠나는 그들처럼, 돌 하나에 발자국 하나 날 품었던 돌의 품을 빠져나가는

 

 엄마는 자신의 아랫돌을 빼내 내 청춘에 괴어주곤 했어 그렇게 쌓아올린 내 생의 부실한 건축

 

 나는 돌 틈새로 바깥을 바라보기도 해 엄마는 돌을 키운 걸까 심장이 뛰고 간혹 꿈을 꾸기도 하는 빛, 그들을 머금은 돌에 꽃이 피어오르기도 하는

 

시집 <우리는 따로 서 있다>, 천년의 시작

 

 


 

 

오유정 시인 / 5월 백숙

 

 

수증기가 새어나오고 있다

뜨거운 물방울 튕기면서

냉장고에 식탁에 커튼에

목이 잘린 울음을 먹인다

마늘과 인삼 대추가

뭉개진 나를 점점 한숨 속으로 몰아넣고

창밖은 여름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 있다

내장 대신 찹쌀을 품고 찰지게 익어가며

숙련된 솜씨로 뱃속을 하얗게 익혀내고 있다

듬성듬성 꿰맨 바늘 지나간 실자국 따라 껍질이 녹아

건드리면 줄줄 벗겨질 기세로 익고 있다

뜨거운 저 그릇 속에

몸을 담고 하루를 지내면

모난 나도 구석구석 둥글게 녹아내릴까

계절을 잃어버린 5월

담장 따라 피어올랐던 줄장미가 집으로 들어와

뜨거운 수증기에 데인 듯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고 있다

 

 


 

 

오유정 시인 / 종기를 짜내다

 

 

목을 씻는데

종기자국에서 또 고름이 난다

 

곰팡이 핀 아랫목에서

살 속을 파고들던 손톱,

 

눅눅한 어머니 무릎 위에 슬어놓았던 눈물이

알을 깨고 방안 가득 터져 나온다

 

흉터를 더듬을수록

몸이 흐물흐물 무너져 내리고 있다

 

 


 

 

오유정 시인 / 장터, 그 중 하나

 

 

매일,

이동식 매장을 펼쳤다 거두는 일

그가 하루를 일망하고 타진하는 것

 

무정란을 쌓아놓고

닭의 시선

신선한 각도 생성을 기다리는 일상

 

여유를 부리듯

치킨조각 양념을 그렸다 지워보는

가늘고 짧은가래떡 건축

 

화목금일수토는 난해해

큰컵 속에 잠겨

자라다만 아기 컵들의 가격 같아

 

막 써 붙인 가격표처럼

생은 그저 대충 대충

 

봄비 지나간 혈관이 아파

신경성일까

햇살 지워진 얼굴에 만연한 적자

 

엇박자로 들리는 어떤 소리들

소문과 같이 사라진 그대들은 모두

천년간의 적자

 

치킨조각을 뒤적뒤적

쓸만한 백열등 하나 찾노라면

탁! 하고 이마에 들러붙는

그 어떤

 

-계간 《시》 2022년 가을호에서

 

 


 

오유정 시인

경기도 안성 출생.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창과 졸업. 충남대학교 일반대학원 국문학과 박사과정. 문학박사. 2004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시집 『푸른집에 머물다』 『우리는 따로 서 있다』, 에세이집 『소리를 삼킨 그림자처럼』. 2003년 혜산 박두진 문학작품상 수상. 대전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