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진 시인 / 천국
여기가 바로 천국이다 과천 현대미술관 앞산 골짜기 먹이 찾는 토끼 다람쥐.... 이름 모를 맷새들 바람 없이도 눈가루 터는 마른 갈대 마른 향기
나만 없어지면 여기가 천국이다
그러나 나는 세상이 더 좋다 나 있어서 용서가 필요한 이 세상이 더 좋다 해마다 새 기회로 설날이 찾아오는.
-시집 『봄비 한 주머니』, 창비, 2000
유안진 시인 / 조각달
사랑이 떠난 후에 알게 모르게 허물어진 몸 허공에 떠도는 줄 혹시 알리 또 모르리만 이 길이 내 길이리라 여겨 홀로 기웃대었다 그대 뉘 지아비 되고 나 또한 지어미 되니 운명이 꾸미는 장난에 맹물 같은 웃음뿐 가벼이 반공중에서 사라지고 말아라 무궁한 세월이 흘러 저승길 더듬을 제 그 누가 문책하면 품안에서 꺼내 뵈리 네 가슴 노리던 비수
유안진 시인 / 바늘에게 바치다
어둠에 저항하는 한 송이 작은 꽃 30촉 알전구 아래에서 바늘 귀를 더듬던 어머니
세상으로 뚫린 유일한 숨구멍으로 의식주를 실어 나르던 낙타의 바늘에게
유안진 시인 / 그대들도 저대들도 이대에게는
있는 현실 여기 아닌 없는 현실이 더욱 현실인 나 이대에게는 무덤덤한 너희, 거기의 그대들도 시큰둥한 그들, 저기 저대들도 마찬가지 그림의 떡 그림의 떡으로는 배불러서 살찌는 내 허무虛無
-시집 <둥근 세모꼴>에서
유안진 시인 / 내 방 하나
식구들이 다 잠들고 통행금지 싸이렌도 울린 지 한참이나 지나고서야 부엌에서 쓸까? 거실에서 쓸까? 원고지를 싸들고 내 방(房)하나 소원했는데 통금도 없어지고 잠들어 줄 식구들 다 떠나가고 집 한 채가 통째 내 방이라니 내 소원이 이런 천벌(天罰)이 되고 말다니요
(月刊文學, 2023년 7월호)
유안진 시인 / 상처가 더 꽃이다
어린 매화나무는 꽃피느라 한창이고 사백 년 고목은 꽃지느라 한창인데 구경꾼들 고목에 더 몰려섰다
유안진 시인 / 살아온 세월은 아름다웠다
살아온 세월은 아름다웠다고 비로소 가만가만 끄덕이고 싶습니다.
황금저택에 명예의 꽃다발로 둘러싸여야 만이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길지도 짧지도 않았으나 걸어온 길에는 그립게 찍혀진 발자국들도 소중하고 영원한 느낌표가 되어 주는 사람과 얘기 거리도 있었노라고...
살아온 세월은 아름다웠다 살아온 세월은 아름다웠다고 비로소 가만가만 끄덕이고 싶습니다
작아서 시시하나 안 잊히는 사건들도 이제 돌아보니 영원한 느낌표가 되어 있었노라고...
그래서 우리의 지난날들은 아름답고 아름다웠으니 앞으로도 절대로 초조하지 말며, 순리로 다만 성실을 다하며, 작아도 알차게 예쁘게 살면서, 이 작은 가슴 가득히 영원한 느낌표를 채워 가자고...
그것들은 보석보다 아름답고 귀중한 우리의 추억과 재산이라고 우리만 아는 미소를 건네주고 싶습니다
미인이 못 되어도, 일등을 못 했어도, 출세하지 못 했어도, 고루고루 갖춰 놓고 살지는 못해도 우정과 사랑은 내 것이었듯이 아니 나아가서 우리의 것이듯이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살고자 합니다
그대 내 가슴에 영원한 느낌표로 자욱져 있듯이 나도 그대 가슴 어디에나 영원한 느낌표로 살아있고 싶습니다
유안진 시인 / 방향
한 포기에서도 먼저 피는 꽃이 있다 볕바른 쪽이다
한 나무에서도 더 잘 익는 과일이 있다 당신 쪽이다
한 하늘의 노을도 더 붉은 쪽이 있다 가슴 쓰라린 쪽이다 절두산 부활의 쪽
유안진 시인 / 시인! 대단 하네
시집 『왜가리는 외다리로.....』의 '이름'이라는 작품에서 박현태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이름은 엄마와 여보-라고 썼네
경전(經典)에도 없는 만고의 진리이네
시인(詩人)! 정말 대단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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