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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도현 시인 / 북행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6. 24.

안도현 시인 / 북행

 

 북, 이라는 글자는 우물의 얼음처럼 검지

 북, 이라고 쓰고 북쪽을 생각하면 캄캄해지지

 그렇다고 해도 아까시 꽃이 필 때 꽃을 따라 북으로 가는 트럭들 좀 생각해 봐 그 운전사에게는

 북행이 참말로 환했을 거야

 볕은 장글장글 따사롭고 바람은 솔솔 보드라운데*

 말하자면 짐칸에 해를 태우고 가는 거잖아 꽃에게 삿대질할 일 없고 꽃자루의 멱살을 잡을 일도 없지

 꽃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간 건 아니지만

 2018년 9월 18일, 나는 서울공항에서 평양국제비행장으로 가는 공군 1호기를 탈 기회가 있었어, 별다른 장식 없이 조용히 낡아가는 고려호텔에서 돌목어가 뭘까 하면서 돌목어식해를 먹었고

 북, 이라고 아무도 종이 위에 쓰지 않는 계절이야

 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혼자 이렇게 적어보지

 백설기, 약밥, 칠면조말이랭찜, 해산물 물회, 과일남새생채, 상어날개야자탕, 백화대구찜, 자신소심옥구이, 송이버섯 편구이와 볶음, 흰 쌀밥, 송어국, 도라지 장아찌, 오이숙장과, 수정과, 유자고, 강령록차

 평양의 목란관에서 열린 연회의 차림표를 북쪽 표기대로 적었다가

 북, 이라고 썼다가

 지우지

 북, 이라는 글자는 우물처럼 어두워서

 북, 이라고 쓰면 수면의 최상부에 두레박 밑바닥 닿는 소리가 나서

​* 백석의 시 「귀농」의 한 구절

-계간 『시의 시간들』 2024년 가을호 (창간호) 발표

 

 


 

 

안도현 시인 / 배를 매어 두는 일

 배를 매어 두는 일

 뱃줄을 팽나무 허리에 묶고 배를 하룻밤 해변에 재우는 일

 그러고 나서 나는 배를 잊었다 나무 상자처럼 삐걱거리는 방에 담겨 나하고 배하고의 캄캄한 거리를 생각해 보다가, 나는 한낱 배를 부리는 선부(船夫)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타고 온 배를 팽나무에게 맡기고

 뱃머리가 육지의 가슴팍에 이마를 문지르도록 놔두고

 물결을 결박하는 일

 맨몸으로 배를 당겨 끌어올리는 일

 그 어느 것도 혼자 유순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누군가 왜 그랬느냐고 물으면 바다가 딱딱해서 그랬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밀착하면서 집착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수평선을 그어 놓고 국경을 넘지 않았다고

 

 기껏해야 나는 나무로 짠 관에 혼자 올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죽음을 밟고 바닷속의 죽음을 골라내거나 시장에 죽은 물고기를 내다 팔면서 말이다

 뱃줄을 몸에 감고 팽나무는 밤새 허리께가 쓰려서 울 것이다

 팽팽하게 배를 당겼다가 무심하게 풀어주었다가 뱃줄은 바다의 브로커처럼 거들먹거릴 것이고

 해변이 눈꺼풀을 끔벅거리겠지

 눈발이 쏟아지면서 흰 그물을 세상에 던지는 밤

-계간 『시의 시간들』 2024년 가을호 (창간호) 발표

 


 

 

안도현 시인 / 그대를 만나기 전에

 

 

그대를 만나기 전에

나는 빈 들판을 떠돌다 밤이면 눕는

바람이었는지도 몰라

 

그대를 만나기전에

나는 긴 날을 혼자 서서 울던

풀잎이었는지도 몰라

 

그대를 만나기 전에

나는 집도 절도 없이 가난한

어둠이었는지도 몰라

 

그대를 만나기 전에

나는 바람도 풀잎도 어둠도

그 아무것도 아니었는지도 몰라

 

 


 

 

안도현 시인 / 그립다는 것

 

 

그립다는 것은

가슴에 이미

상처가 깊어졌다는 뜻입니다

나날이 살이 썩어간다는 뜻입니다

 

 


 

 

안도현 시인 / 깃발

 

 

깃발을 뜯어 먹으려고

가까이 다가갔다가

바람은 깃발한테 붙잡혔다

깃발은 손아귀로 바람을 움켜 쥐었다 폈다 하면서

 

또 못된 짓 할래, 안 할래

자꾸 묻는다

 

-시집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에서

 

 


 

 

안도현 시인 / 돌아누운 저수지

 

 

둑에서 삼겹살을 굽던 시절은 갔네

물위로 일없이 돌을 던지던 밤도 갔네

저수지 그 한쪽 끝을 잡으려고 헤엄치던 날들도 갔네

청둥오리 떼처럼 몇 번 이사를 하고

청둥오리 떼처럼 또 저수지를 찾아왔네

저렇게 저수지가 꽝꽝 얼어 있는 것은

얼어서 얼음장을 몇 자나 둘러쓰고 있는 것은

자기 속을 보여주기 싫어서

등을 돌리고 있는 거라 생각하네

좀더 일찍 오고 싶었다고

등을 툭 치며 말을 걸고 싶지만

저수지가 크게 크게 울 것 같아서

나는 돌 하나 던지지 못하네

 

 


 

안도현(安度昡) 시인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1996 시와 시학상 젊은시인상. 1998 제13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2002 제1회 노작문학상. 2002 제10회 모악문학상. 2005 제12회 이수문학상. 2007 제2회 윤동주 문학상 문학부문.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2012 임화문학예술상.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 』 『북항』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등. 현재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