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 시인 / 원앙
나무는 시간처럼 공중에서 우는 듯한 나이테를 만들기만 했다 내 손바닥의 나이테 한 사람이 남긴 호수, 빛나는 오수午睡 원앙들은 어디서 왔을까 돌무더기에 나란히 앉아 서로의 깃 속에 얼굴을 묻고 일렬로, 사진처럼 덧없이 움직임을 멈춘 채 겨울 추위를 견디며, 물 그늘에 일렁이는 찬 기운이 스치는 똑같은 눈빛, 똑같은 색깔로 원앙들은 고개를 서로에게 파묻고 바람에 깃털을 날리고 있다 그들은 겨울의 손아귀에서 꿈의 조각을 물 그늘에 반짝거리며 버틴다 차가운 공기에 닿은 돌무더기 아래 일렁이는 물살은 그들의 공유된 시선을 반영하는 캔버스가 되고, 같은 색조의 눈과 바람의 어루만짐에 펄럭이는 깃털을 비춘다 얼어붙은 호수의 중앙 삐죽 솟아난 돌무더기에 앉아 서로의 깃털을 쓰다듬으며 곧 서로의 춤으로 연결될 그들 오수의 고요함 속에서 나의 시선은 겨울바람에 부푸는 원앙들의 불가사의한 비행을 향해 헤매 다닌다 무한의 시간을 목격한 나무들을 배경으로 호수에 비친 그들은 똑같은 눈빛과 색깔로 이야기를 나눈다 한 사람이 남긴 호수가 내 손바닥에서 원앙들을 헤엄치게 하는 겨울의 불행이 빛나는 때, 멀리서 우아한 춤을 추는 겨울 나뭇가지를 더 높이 공중으로 밀어 올린다
박형준 시인 / 천국은 모래알로 이루어져 있나
도시주의 세상에 가을은 노란색 하나로 온다 낙엽 아래서 밟혔다 재빠르게 사라지는 물컹거림 같은 것
먼 데서 습지의 물오리떼가 반짝인다 타인의 발자국 소리에 수줍어하며 갈대숲 사이 물 위로 미끄러져 숨는 물오리떼 날개를 서로 곁에 붙이고 보금자리 만드는 물오리떼
나는 시골주의 사람은 아니지만 가을의 노란색이 냄새와 함께 배어 다가오던 때를 기억한다
가을 논둑 길 걸어 집으로 돌아갈 때 공중에 가만히 멈춰 선 저녁연기를 바라보며 부엌에서 밥을 지으며 기다리는 님의 발자국 소리를 생각하던 그때
가마솥을 들어 올리며 펄펄 끓는 밥물 냄새와 그 아래에서 기다림으로 눌러붙은 누룽지 저녁연기와 저녁노을에서 떠올리며 가을 논둑 길 걸어 집으로 돌아가던 그때 못다 한 말들을 털어놓듯 옆구리에서 서걱거리던 낱알의 노란색
저녁 산책길 옆 피로에 젖은 사람들의 위액이 뿌려놓은 것 같은 해바라기밭 노란 얼굴에서 천국의 모래알들이 반짝인다
-『내외일보 /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2022.10.06
박형준 시인 / 지붕
바람이 몹시 부는 날 지붕이 비슷비슷한 골목을 걷다가 흰 비닐에 덮여 있는 둥근 지붕 한채를 보았습니다.
새가 떨고 있었습니다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다가 날개를 접고 추락한 작은 새가 바람에 떠밀려가지 않으려고 흰 비닐을 움켜쥔 채 조약돌처럼 울고 있었습니다.
네모난 옥상들 사이에서 조그맣게 웅크린 우는 발로 견디는 둥근 지붕
박형준 시인 / 철새 같은 이름으로 지나가는 가을
새들의 이름을 몰라 바라보기만 한다
그런 적이 있었지 무심히 앞을 보고 가는 내 곁을 지나가며 누군가도 이름이 생각날 듯 말 듯하여 손만 들었다 뒷모습에 인사했겠지
새들은 저마다 강물 속 돌 위에 서서 햇빛에 취해 움직임이 없다 아침 새들을 나처럼 바라보는 옆 사람에게 용기를 내어 이름을 물어보니, 새들의 이름은 철새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선(禪)을 하듯 새들은 일렬종대로 서서 낮잠에 빠져 있다 강물 속에선 오후의 가을 햇살이 자전거 바퀴를 굴리듯이 반짝이는 물살을 튕겨 낸다
이름을 부르지 못해 나도 뒷모습만 바라보다 떠나보낸 고향 사람 같은 이들이 있었지 철새 같은 이름으로 내 곁을 지나간 그런 가을이 있었지
박형준 시인 / 엽서
공중이란 말 참 좋지요 중심이 비어서 새들이 꽉 찬 저곳
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를 낳고 냄새를 피웠으면
공중이라는 말
뼛속이 비어서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새떼
박형준 시인 / 이 봄의 평안함
강이나 바다가 모두 바닥이 일정하다면 사람들의 마음도 모두 깊이가 같을 것이다 그러면 나무의 뿌리가 땅 밑으로 뻗어나가는 것과 허공을 물들이는 잎사귀의 춤 또한 일정할 것이다 저기 나무 속에서 사람이 걸어나오도록 인도하는 것이 봄이라면 마음 속에서만 살고 있는 말들을 꺼내주는 따뜻한 손이 또한 봄일 것이다 봄꽃들은 허공에서 우리를 기쁨에 넘쳐 부르는 손짓이며 누군가 우리를 그렇게 부른다면 우리 또한 그처럼 잊혀진 누군가를 향해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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