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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남재만 시인 / 병甁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6. 23.

남재만 시인 / 병甁

 

 

병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에 따라

이름이 지어진다.

물이 들어 있으면 물병

술이 들어 있으면 술병

약이 들어 있으면 약병이 된다.

그래서 병은

그 속에 아무것도 없을 때

비로소

자신만의 이름을 갖는다.

병이라는

 

 


 

 

남재만 시인 / 꽃은 어디에 피는가

 

 

얼핏 보면

지천으로 피는 것 같다만

과연 어디에 꽃은 피는가

 

저 하늘의 별들이

눈길을 주는 곳에

꽃은 피고,

 

지난 겨울

매섭게 서릿발 치던 곳에

꽃은 핀다.

 

어느 외로운 이 홀로 찾아와

남몰래 눈물 떨구고 간 자리에

꽃은 피고,

꽃이 피면 어둠도 환해지는

그런 곳에 수줍게 수줍게

꽃은 핀다

 

 


 

 

남재만 시인 / 造花(조화)

 

 

다방엘 갔더니 자그마한 화분에

장미 몇 송이가 빨갛게 피어 있다.

조화를

생화 뺨치게 만들어 놓는

사람들의 솜씨에 감탄하며

꽃잎을 살짝 만져봤다.

그때 내 손끝에

하르르 전해오는

장미의 가녀린 떨림.

아, 그 장미는

조화가 아니라 생화였다.

수줍어 얼굴 빨개진.

미안하다 장미야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진

나도 잘 모르겠다.

장미야

정말 미안하다.

 

 


 

 

남재만 시인 / 초침소리

 

 

한밤중 문득 잠이 깼을 때

재깍재깍

재깍재깍

유난히도 크게 들려오는

벽시계의 초침소리.

 

아아 벽시계여

시간의 생쥐여

내가 자고 있는 동안에도 넌

자질 않고, 재깍재깍

내 목숨을 갉아먹고 있었구나.

 

 


 

남재만 시인 (1937.∼2021)

대구에서 출생. 경북대 의과대학을 졸업. 1950년대부터 창작활동. 1979년 [시문학]에 <가을 산사>, <까치소리>가 추천되며 등단. 의사로서 비뇨기과를 경영하며, [수화(手話)] 동인으로 활동. <아직도 하늘은>(1993)으로 1993년 제18회 시문학상을 수상. 【시】 <다부원(多富院) 그 후> <수염을 깎으며> <경국지색(傾國之色)> <울음, 그 원초적 소리> <열반의 문 <섹스의 PR> 【시집】 <까치소리> <아스팔트에 고인 빗물> <아직도 하늘은> <촛불은 온몸으로 어둠을 떠다밀고> <하느님전 상서> <꽃은 어디에 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