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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시인 / 얼음꽃
찬 서리 흰 별빛처럼 내린 아침, 커피한잔 없이 들숨날숨만 데리고 얼음꽃 황홀하게 핀 나무들 사이를 걸었습니다. 추위가 회칼 같은 것으로 제 생살 저미듯 환히 피운 꽃 마음의 살을 막 저미는 꽃, 허나 걷다가 어디쯤서 뒤돌아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시듦도 떨어짐도 없이 지워져 있는 꽃.
눈에 하얀 고리 무늬를 그린 동박새가 눈가루를 뿌리며 납니다. 햇빛이 갑자기 가루로 빛납니다. 눈 알갱이 하나하나에 뛰어들어 사라지는 빛의 입자들, 만난 것 채 알아채기도 전에 벌써 오늘 그리운 얼굴이 찰칵! 방금 눈앞에서 옛 그리움이 되는 꽃.*
황동규 시인 / 오늘 입은 마음의 상처
사람 모여 사는 곳 큰 나무는 모두 상처가 있었다. 흠 없는 혼이 어디 있으랴? 오늘 입은 마음의 상처, 오후내 저녁내 몸속에서 진 흘러나와 찐득찐득 그곳을 덮어도 덮어도 아직 채 감싸지 못하고 쑤시는구나. 가만, 내 아들 나이 또래 후배 시인 랭보와 만나 잠시 말 나눠보자. 흠 없는 혼이 어디 있으랴?
-시집 「몰운대행」중에서
황동규 시인 / 삶의 맛
환절기, 사방 꽉 막힌 감기! 꼬박 보름 동안 잿빛 공기를 마시고 내뱉으며 살다가, 체온 38도 5분 언저리에서 식욕을 잃고 며칠 내 한밤중에 깨어 기침하고 콧물을 흘리며 소리 없이 눈물샘 쥐어짜듯 눈물 흠뻑 쏟다가, 오늘 아침 문득 허파꽈리 속으로 스며드는 환한 봄 기척.
이젠 휘젓고 다닐 손바람도 없고 성긴 꽃다발 덮어주는 안개꽃 같은 모발도 없지만 오랜만에 나온 산책길, 개나리 노랗게 울타리 이루고 어디선가 생강나무 음성이 들리는 듯 땅 위엔 제비꽃 솜나물꽃이 심심찮게 피어 있다. 좀 늦게 핀 매화 향기가 너무 좋아 그만 발을 헛디딘다. 신열 가신 자리에 확 지펴지는 공복감, 이 환한 살아 있음! 봄에서 꽃을 찾을까, 징하게들 핀 꽃에서 봄을 뒤집어쓰지. 광폭(廣幅)으로 걷는다. 몇 발자국 앞서 뛰는 까치도 광폭으로 뛴다. 이 세상 뜰 때 제일로 잊지 말고 골라잡고 갈 삶의 맛은 무병(無病) 맛이 아니라 앓다가 낫는 맛? 앓지 않고 낫는 병이 혹 이 세상 어디엔가 계시더라도.
황동규 시인 / 방파제 끝
언젠가 마음 더 챙기지 말고 꺼내놓을 자리는 방파제 끝이 되리. 앞에 노는 섬도 없고 헤픈 구름장도 없는 곳. 오가는 배 두어 척 제 갈 데로 가고 물 자국만 잠시 눈 깜박이며 출렁이다 지워지는 곳. 동해안 어느 조그만 어항 소금기 질척한 골목을 지나 생선들 함께 모로 누워 잠든 어둑한 어물전들을 지나 바다로 나가다 걸음 멈춘 방파제 환한 그 끝.
황동규 시인 / 손 털기 전
누군가 말했다 '머리칼에 먹칠을 해도 사흘 후면 흰 터럭 다시 정수리를 뒤덮는 나이에 여직 책들을 들뜨게 하는가, 거북해하는 사전 들치며? 이젠 가진 걸 하나씩 놓아주고 마음 가까이 두고 산 것부터 놓아주고 저 우주 뒤편으로 갈 채비를 해야 할 땐데.‘
밤중에 깨어 생각에 잠긴다. '얼마 전부터 나는 미래를 향해 책을 읽지 않았다. 미래는 현재보다도 더 빨리 비워지고 헐거워진다. 날리는 꽃잎들의 헐거움, 어떻게 세상을 외우고 가겠는가? 나는 익힌 것을 낯설게 하려고 책을 읽는다. 몇 번이고 되물어 관계들이 헐거워지면 손 털고 우주 뒤편으로 갈 것이다.‘
우주 뒤편은 어린 날 숨곤 하던 장독대일 것이다. 노란 꽃다지 땅바닥을 기어 숨은 곳까지 따라오던 공간일 것이다. 노곤한 봄날 술래잡기하다가 따라오지 말라고 꽃다지에게 손짓하며 졸다 문득 깨어 대체 예가 어디지? 두리번거릴 때 금칠金漆로 빛나는 세상에 아이들이 모이는 그런 시간일 것이다.
황동규 시인 / 달밤
누가 와서 나를 부른다면 내 보여주리라 저 얼은 들판 위에 내리는 달빛을. 얼은 들판을 걸어가는 한 그림자를 지금까지 내 생각해 온 것은 모두 무엇인가. 친구 몇몇 친구 몇몇 그들에게는 이제 내 것 가운데 그중 외로움이 아닌 길을 보여주게 되리. 오랫동안 네 여며온 고의춤에 남은 것은 무 엇인가. 두 팔 들고 얼음을 밟으며 갑자기 구름 개인 들판을 걸어갈 때 헐벗은 옷 가득히 받는 달빛 달빛.
황동규 시인 / 가을날, 다행이다
며칠내 가랑잎 연이어 땅에 떨어져 구르고 나무에 아직 붙어 있는 이파리들은 오그라들어 안 보이던 건너편 풍경이 눈앞에 뜨면 하늘에 햇기러기들 돋는다.
냇가 나무엔 지난여름 홍수에 실려 온 부러진 나뭇가지 몇 걸려 있고 찢겨진 천 조각 몇 점 되살아나 팔락이고 있다.
쥐어박듯 찢겨져도 사라지긴 어렵다. 찢겨져도 내쳐 숨쉰다.
검푸른 하늘에 기러기들 돌아온다. 다행이다. 오다 말고 되돌아가는 놈은 아직 없다. 오다 말고 되돌아가는 하루도 아직은 없다. 오늘은 강이 휘돌며 모래 부리고 몸을 펴는 곳 나그네 새들과 헤어진 일 감춰둔 곳을 찾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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