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시인 / 무창포(無唱浦) 레퀴엠
그즈음 맹골 바다에는 물루미 떼가 리듬을 잠식했네 점액질은 바다의 건반을 훼방 놓고 빛깔 잃은 황금빛 자리돔은 물속을 부유했지 시건방진 계절 탓에 눈물이 무감한 날들 난 모른 척 탬버린을 찰랑댈 수 없었어 연두 이파리를 물고 리듬이 오선지를 떠나자 꼬리 잘린 음표들은 바다에 뛰어들었지 나지막이 소리를 죽이며 사라지는 눈동자들 노래가 못 된 아우성은 이팝꽃으로 하얗게 날아올랐네
리듬은 우는 것들의 핏방울 사월은 리듬의 젖가슴 먼 바다는 리듬을 잡아먹고 불룩한 배를 두드렸고 사월조차 시치미를 뗐네 바람은 예언을 했었지
리듬이 떠나면 오월은 오지 않는다고 아우성이 등대 불빛으로 돌아오기를 초록에 기대어 빌고 또 빌었네 손톱 발톱이 바진 리듬은 북을 두드릴 수 없어 갈비뼈 사이에서 웅웅대다 회오리 물결 타고 청보리 속울음으로 피어나겠지
죽은 쥐 한 마리가 송장벌레 수십 마리로 돌아오는 순환도 속수무책 무창포 갯벌을 기어 다니며 리듬을 만드는 저 갯것들이 열여덟 웃음인 것을
정선 시인 / 혁명은 아랫도리로부터 시작되지
마타하리를 추억하는 스파이의 밤 열두폭 치맛자락 아래서 꿈틀거렸던 혁명 손바닥 뒤집기처럼 쉬운 혁명이 어떤 이에게는 시간을 바쳐도 오지 않아 문장을 무기 삼아 혁명의 문턱을 서성이며 피끓었던 강령이나 되새김질하고 있다 혁명의 체위는 게릴라 전법처럼 은밀하고 변화무쌍하여서 금방이라도 승리의 동상을 세울 것 같았다 강령이 식상해진 동지들은 울지 않았다 혁명만이 고지 바로 아래서 젖은 날개를 바르르 떨었다 한때 혁명은 학익진법으로 물속을 날았지 서시의 속곳으로부터 앙투아네트 부풀린 치마로부터 전수된 기술로 줄줄이 고지들이 함락당했던 꽃향기 가득한 포화 속 그 밤, 의 마타 하리 붉은 달 속으로 밤이 침몰하고 잔혹한 숲에서 태양이 태어나는 동안 이슬 한 방울에 모두 담아지기도 했던 혁명 풀줄기 하나로도 금세 깨어질 듯한 혁명은 빛바랜 녹색 깃발 앞에서 손을 흔들고 깃발은 별다른 뒷담화도 없이 가난하게 나부끼고 있다 공명통이 작은 내 혁명의 체위는 순응법 붉게 타올랐던 스무 살 혁명의 바다가 넋두리나 풀어놓은 것을 낄낄대며 바라볼 뿐 혁명은 늘 앙가슴에 맷돌을 달고 다녔다 어느 순간 혁명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도망치고 말았던 게다 엔드리스 네임리스* 혀로는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지 술로는 혁명을 바꿀 수 있을까 떫은 혁명을 밤새 씹느라 잇몸은 짓무르고 국밥 한 그릇을 먹는 것이 더 소중한 아침 이제 혁명은 츄로 계곡에서 털털 끓다 슬프게 굳어버린 마그마 아랫도리에 물린 혁명의 목덜미 콧털에 물린 혁명만이 힘을 갖지 아, 헤픈 혁명 혁명은 아름답게 피어야 하네 에르네스토체의 콧털로부터, 기필코, 다시
*너바나의 노래 제목 <Endless Nameless>
-시집 <안부를 묻는 밤이 있었다>에서
정선 시인 / 물색없다. 봄
저들의 자발없는 짓을 보아라 다물 줄 모르는 붉은 목젖을 지난겨울 고요히 비워둔 언덕에 이리도 헤프게 웃음을 흘리다니 담장 위에는 암고양이가 늙은 울음을 울었고 버드나무 앞가슴은 팔랑, 여며지지 않았다 개나리 아래 수탕나귀들은 오줌발을 간수하지 않았다 왜 또 징허게 모른 척 허벅지를 주무르는지 바람에서는 푸른 말밥굽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민들레는 엉덩이를 드러내놓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부정으로 완성된 저 찬란한 무덤 물색없는 봄을 환한 빛들의 폭력을 미끄덩 뭉개고 싶었다
《열린시학》 2019. 겨울호
정선 시인 / 어떤 위로, 속초
해변의 골짜기에는 청록의 어둠이 고여 있다 아이파크에서 휘황한 속초아이를 내려다보는
나에게는 피노누아 한 잔과 몇 방울의 빗물과 바삭거리는 크래커가 있고 씹다 만 칡소 얼룩 몇 점이 있다
나에게는 또다시 피노누아 한 잔과 내 몸을 통과하는 몇 줌의 바람과 녹슨 목소리로 타임아웃 오브 마인드를 노래하는 밥 딜런이 있다 낡은 소파에는 붉은 연민이 웅크린 채 나를 바라본다
여린 짐승들이 크르렁대는 시간
지금은 바다를 향하여 잔을 높이 들 때
멀리 오징어잡이 배의 환한 불빛 한 가닥이 밀서처럼 당도해 커튼 뒤로 숨는다
시가를 한 입 빨아들이니 밀서가 해바라기꽃으로 핀다
둥근 잔에는 압생트가 출렁거린다
압생트는 상실의 다른 얼굴,
밥 딜런은 지루하다
그의 가래 끓는 소리가 사랑스러울 즈음 사랑은 먹먹한 귀를 자르고 곧 떠날 채비를 할 것이다
이왕이면 이별이 압생트 푸른 불꽃을 피웠으면 좋겠다 결핍이 베푼 낭만은 폭죽놀이에도 허기가 진다
아무것도 본 것 없는 아무것도 들은 것 없는 속초
속초에서는 누구나 마음의 옷고름을 푼다
그래서 더욱 위로가 되는 벌거숭이
속초, 당신
서툰 이별은 밭은기침 같아서
애가 탄 속초는 해변의 골짜기에 하얗게 뼈로 눕는다
나도 슬픔을 무릎베개 삼아 눕는다 텅 빈 옆구리에 가마우지 떠난 작은 새섬이 들어앉는다
나는 피노누아로 향기롭게 익어간다
정선 시인 / 보라는 아프다
햇빛이 하루 소임을 다할 때 숨죽인 짐승처럼 보라는 서녘 하늘에 제 거친 숨을 토해낸다 한 호흡에는 열정을 한 호흡에는 절망을 그 많은 호흡들이 갈 곳을 몰라 때로는 먹구름으로 밤새 궁륭을 헤매고 때로는 뜨거움을 바다에 쏟으며 통곡하는 걸 바람은 뜬눈으로 기록한다
지산동 1975장 마당 높은 집 보라는 자꾸만 디귿자형 마당으로 흘러간다 뭐슬 잘혔다고 워디서 본데없이 햄부러 죽어도 나는 성님이라고 못 불르겄소 기어이 엄마의 머리채를 휘어잡던 그 여자 어허이 뒷짐 지고 헛기침만 하던 아버지 불룩한 배를 내밀며 퐁퐁다리를 건너가던 본데없는 년 울 엄마를 몬당허게 본 년 그 팔뚝을 물어뜯지 못한 열세살 아이
보라는 도드라진 흉터와 기억들의 불순물 한 열정의 붉음과 한 절망의 푸름과 진흙탕을 뒹굴다 바닥까지 납작 엎드린 후 증오의 순도 깊숙이 염통의 피가 화학적 촉매제로 반응한 보라! 혹자는 애증이라 부른다 조금만 증오를 걷어내면 붉은 기와가 붕어처럼 퍼덕거려 제 처마를 잃어버리는 경계의 위태로움 차마 발설하지 못한 울타리의 배후 지금 코모도 걸음으로 느릿느릿 애증의 저녁이 온다 감정이 녹아 있지 않은 얼굴 위에 흐르는 빛 오랜 기다림 끝에 보라가 운다
날것의 보라 격렬한 후 쓰리다
-2014년 《애지》가을호
정선 시인 / 볼기의 탄력이 떨어질 즈음 사랑도 끝났다
볼기가 이쁜 남자를 사랑했던 것은 신념이 그 볼기에서 빛났기 때문이지 청바지 밖으로 튕겨나오던 탱탱함 사자무리를 쫓고 누고기를 뺏어오던 아프리카 부족처럼 바람과 맞장뜨며 거리를 활보했기 때문이지 내가 존경하던 당신의 신념은 누대로부터 지켜오던 대밭에서 나오는 거라고 확신했지 푸른 즙이 뚝뚝 떨어지면 당신의 볼기는 탄력이 배가되었는데 그만 바람과 수작하던 그날 다물어지지 않은 당신의 입에서는 침이 질질 나는 대나무가 휘어져 꺾이는 소리를 들었지 오늘은 쭈글해진 당신의 볼기짝을 안주로 씹어 보겠어 맛깔난 볼기란 양 볼기짝이 바람까지 물어뜯는 쫀득한 진품을 말하지 당신의 볼기가 한물간 징후는 바람으로 문장을 갈기는 날부터임을 즉, 혀에서 근성이 빠져나갈 때부터임을 볼기는 헤부작 넙데데 탄력을 잃고 말았어 그것은 입술의 찰진 탄성과 괄약근의 조임과 무관하지 않더군 배출이 헤퍼진 괄약근은 슬프지 당신마저도 돌보지 않아 악어 눈꺼풀처럼 처진 신념과 굴신의 간격에서 갈팡질팡하는 볼기짝을 노을 바라보듯 요구하는 건 형벌이지 자, 지금은 조일 때 바람을 빼고 두 볼기짝에 근성을 불어넣자고 볼기가 푸른 신념을 퉁길 때 사랑도 탱탱하게 구르는 법 당신의 볼기를 바라보는 일이 고통스러워 불량하게 내 염통엔 대나무꽃이 피고 있다
-2011년 《시애》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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