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석 시인 / 연어
연어떼가 올라오는지 오십천 물이 은빛으로 반짝이며 갈매기 발을 차게 간질인다. 자갈 틈새로 흐르는 구름이 여울지게 자지러지고 강은 들뜬다.
연어들이 돌아온다 거슬러오르는 언어 같은 걸 밀어올려주며, 알벤 배를 터트리려는 욕망의 물길을 쫓아 연어들이 떼지어 오른다.
떼지어, 나는 본다. 그 희귀의 여울에서 되돌아가려는 천진스런 악의 언어와 물그늘 무늬에 자기 그림자를 짜맞추는 숨김의 말이 퍼덕이는 것을.
이하석 시인 / 어떤 풍경 사진
길은 사랑이 무르익기 전까지 집을 가르쳐주지 않는 이 같습니다. 끊임없이 구불거리며, 나타납니다.
나는 굴참나무 아래서 죽음 쪽으로 떠밀려간 이들의 외길을 짚습니다. 누가 주춤거리며 돌아보고 누가 재촉하는 게 잔광 속에 찍혀 있습니다.
어떻게 남겨진 사랑이 긁어댄 풍경인가요?
풍경의 헤진 언저리에 우거진 어둠을 좀더 밝게 인화하면, 행방불명으로 도드라지는 이름들과 아버지의, 되돌아 나오지 못한 막다른 길이 보입니다
이하석 시인 / 긴 나무 의자
바람과 비에 바랜 채 햇빛 속 하얗게 기다리고 있는 긴 의자
남녀가 거기 앉아서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밀어 쓸어뜨리면 여자의 머리는 의자 밖으로 빠지고 의자의 다리 하나가 문득 삐걱댄다 사랑이 가볍지 않고 한쪽으로 너무 기운 탓이다
숲이 끊임없이 사운대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의 개구리들은 요란히 운다 어딜 향하든 길들이 급하지 않다
사랑이 아니라도 아무나 의자에 앉으면 숲 아래 잠든 물빛에 숨 죽일 것이다 그의 다리와 의자의 다리는 튼튼해서 외롭고 때로 무너져 다시 고쳐놓으면 의자는 제 깡기를 한동안 유지하려 애쓴다
숲으로 들어가는 길과 숲에서 나오는 길의 목에 의자는 성실하게 앉아 있다 때로 달빛이 물컵 엎지른 것처럼 쏟아져내려도 의자는 기다리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버티며 늘 지난 일처럼 앉아 있다
이하석 시인 / 뒤쪽 풍경 1
폐차장 뒷길, 석양은 내던져진 유리 조각 속에서 부서지고, 풀들은 유리를 통해 살기를 느낀다. 밤이 오고 공기 중에 떠도는 물방울들 차가운 쇠 표면에 엉겨 반짝인다, 어둠 속으로 투명한 속을 열어 놓으며. 일부는 제 무게에 못이겨 흘러내리고 흙 속에 스며들어 풀 뿌리에 닿는다, 붉은 녹과 함께 흥건한 녹물이 되어. 일부는 어둠 속으로 증발해 버린다. 땅 속에 깃든 쇠조각들 풀뿌리의 길을 막고, 어느덧 풀 뿌리에 엉켜 혼곤해진다. 신문지 위 몇 개의 사건들을 덮는 풀. 쇠의 곁을 돌아서 아늑하게, 차차 완강하게 쇠를 잠재우며 풀들은 또 다른 이슬의 반짝임 쪽으로 뻗어 나간다.
이하석 시인 / 뒷쪽 풍경 2
먼지 속에서 뒤척이며 찢어진 신문에서 떨어져 나와 푸른 여자 먼지 일으키며 날아갔다. 비고 우그러지고 벗겨진 채 햇빛에도 바랜 채 뒹굴던 깡통들 뻔뻔하게 흙 속에 처박히고, 풀들 어쩌다 깡통 속에 다리 뻗쳐 부르튼 다리로 깡통들 뚫어 버린다. 나비 올 때쯤 기약도 없이 꽃피는 민들레, 저 혼자 씨앗 흩이고 쓰러진 후, 그 곁에 내던져진 채 몇 개의 사건들 기억해 내려고 심각해진 남자들의 찢어진 얼굴들. 그 얼굴들만 휴지로 빠져 나와 바람에 사라지는 것들 속에 저절로 섞이며, 혹은 모든 사건들 속에서 평온하게 따로 미끄러지면서.
이하석 시인 / 길
고샅길 빠져나와 구절구절 묏길로
뒷길도 밝히고 앞길조차 감추며
가시네 보따리 할배
큰일 내려 가시네
이하석 시인 / 길노래
가는 길 돌아보니 날 구름 속 구비구비
수풀길 서걱서걱 돌길은 우툴두툴
산그늘 삭여 가면서 고갯길을 넘기네
-시집 『해월, 길노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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