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하석 시인 / 연어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6. 25.

이하석 시인 / 연어

 

 

연어떼가 올라오는지

오십천 물이 은빛으로 반짝이며

갈매기 발을 차게 간질인다.

자갈 틈새로 흐르는 구름이 여울지게 자지러지고

강은 들뜬다.

 

연어들이 돌아온다

거슬러오르는 언어 같은 걸 밀어올려주며,

알벤 배를 터트리려는 욕망의 물길을 쫓아

연어들이 떼지어 오른다.

 

떼지어, 나는 본다. 그 희귀의 여울에서

되돌아가려는 천진스런 악의 언어와

물그늘 무늬에 자기 그림자를 짜맞추는 숨김의 말이

퍼덕이는 것을.

 

 


 

 

이하석 시인 / 어떤 풍경 사진

 

 

길은

사랑이 무르익기 전까지

집을 가르쳐주지 않는 이 같습니다.

끊임없이 구불거리며, 나타납니다.

 

나는 굴참나무 아래서

죽음 쪽으로 떠밀려간 이들의 외길을 짚습니다.

누가 주춤거리며 돌아보고

누가 재촉하는 게 잔광 속에 찍혀 있습니다.

 

어떻게 남겨진 사랑이 긁어댄 풍경인가요?

 

풍경의 헤진 언저리에 우거진

어둠을 좀더 밝게 인화하면,

행방불명으로 도드라지는 이름들과

아버지의, 되돌아 나오지 못한

막다른 길이 보입니다

 

 


 

 

이하석 시인 / 긴 나무 의자

 

 

바람과 비에 바랜 채

햇빛 속 하얗게

기다리고 있는 긴 의자

 

남녀가 거기 앉아서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밀어 쓸어뜨리면

여자의 머리는 의자 밖으로 빠지고

의자의 다리 하나가 문득 삐걱댄다

사랑이 가볍지 않고 한쪽으로 너무 기운 탓이다

 

숲이 끊임없이 사운대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의 개구리들은 요란히 운다

어딜 향하든 길들이 급하지 않다

 

사랑이 아니라도 아무나 의자에 앉으면

숲 아래 잠든 물빛에 숨 죽일 것이다

그의 다리와 의자의 다리는 튼튼해서 외롭고

때로 무너져 다시 고쳐놓으면 의자는

제 깡기를 한동안 유지하려 애쓴다

 

숲으로 들어가는 길과 숲에서 나오는 길의

목에 의자는 성실하게 앉아 있다

때로 달빛이 물컵 엎지른 것처럼 쏟아져내려도

의자는 기다리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버티며

늘 지난 일처럼 앉아 있다

 

 


 

 

이하석 시인 / 뒤쪽 풍경 1

 

폐차장 뒷길, 석양은 내던져진 유리 조각

속에서 부서지고, 풀들은 유리를 통해 살기를 느낀다.

밤이 오고 공기 중에 떠도는 물방울들

차가운 쇠 표면에 엉겨 반짝인다,

어둠 속으로 투명한 속을 열어 놓으며.

일부는 제 무게에 못이겨 흘러내리고

흙 속에 스며들어 풀 뿌리에 닿는다,

붉은 녹과 함께 흥건한 녹물이 되어.

일부는 어둠 속으로 증발해 버린다.

땅 속에 깃든 쇠조각들 풀뿌리의 길을 막고,

어느덧 풀 뿌리에 엉켜 혼곤해진다.

신문지 위 몇 개의 사건들을 덮는 풀. 쇠의 곁을 돌아서

아늑하게, 차차 완강하게 쇠를 잠재우며

풀들은 또 다른 이슬의 반짝임 쪽으로 뻗어 나간다.

 

 


 

 

이하석 시인 / 뒷쪽 풍경 2

 

 

먼지 속에서 뒤척이며 찢어진 신문에서 떨어져 나와

푸른 여자 먼지 일으키며 날아갔다.

비고 우그러지고 벗겨진 채 햇빛에도 바랜 채

뒹굴던 깡통들 뻔뻔하게 흙 속에 처박히고,

풀들 어쩌다 깡통 속에 다리 뻗쳐

부르튼 다리로 깡통들 뚫어 버린다.

나비 올 때쯤 기약도 없이 꽃피는 민들레, 저 혼자

씨앗 흩이고 쓰러진 후, 그 곁에 내던져진 채

몇 개의 사건들 기억해 내려고 심각해진 남자들의

찢어진 얼굴들. 그 얼굴들만 휴지로 빠져 나와

바람에 사라지는 것들 속에 저절로 섞이며,

혹은 모든 사건들 속에서 평온하게

따로 미끄러지면서.

 

 


 

 

이하석 시인 / 길

 

 

고샅길 빠져나와 구절구절 묏길로

 

뒷길도 밝히고 앞길조차 감추며

 

가시네 보따리 할배

 

큰일 내려 가시네

 

 


 

 

이하석 시인 / 길노래

 

 

가는 길 돌아보니 날 구름 속 구비구비

 

수풀길 서걱서걱 돌길은 우툴두툴

 

산그늘 삭여 가면서 고갯길을 넘기네

 

-시집 『해월, 길노래』에서

 

 


 

이하석 시인

1948년 경북 고령 출생.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1971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 <투명한 속> <김씨의 옆얼굴> <우리 낯선 사람들> <연애 간> <천둥의 뿌리> 등. '대구문학상',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대구시문화상'(문학 부문) 등을 수상. 영남일보 논설실장 등 역임. 현 : 대구문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