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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15159

김영심 시인 / 대숲 외 2편 김영심 시인 / 대숲 쭉쭉 뻗은 대나무의 비결을 아는지 늘 그 속은 비어 오욕으로 가득 찬 그 누군가 대숲에 들어갔다간 숲 밖으로 던져지지만 마음을 비우고 대숲에 들면 몸이 한없이 가벼워집니다 바람 불 때마다 온몸으로 그 누가 우는소리 대숲으로 대숲으로 푸르름과 올곧음을 보러 갑시다 푸른 댓잎에 귀를 씻고 옵시다 -시집 김영심 시인 / 북치다, 장구소리 들리다 · 1 둥둥 북을 치듯 나를 친다 내 몸에 담겼던 소리들이 북채를 따라 튀어나온다 오래 묵혀둔 생각을 되새김질 하면 어디선가 허공을 치며 날아오는 저 소리 떼 누군가 채를 잡으면 북과 장구가 따라 울고 바람에 실려 오는 울음소리를 마음이 먼저 받아 읽었다 둥둥 소리가 내 몸을 치고 몸에서 빠져나간 소리들은 허공을 찢으며 사라졌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 2023. 5. 26.
김왕노 시인 / 태양의 거리와 태양의 돌과 나 김왕노 시인 / 태양의 거리와 태양의 돌과 나 1 나는 늘 태양의 거리란 말이 입에 감돌고 있다. 빛나는 태양을 바라보며 가지고 잎이고 껍질이고 다 사라지고 몸뚱이 하나만 남았으나 끝내 꿋꿋하게 서 있는 강대나무를 보면 경외감마저 들고 태양의 거리란 말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태양과 강대나무와 내가 이룬 삼각구도 불멸의 풍경 같아 나도 우듬지까지 꽃 피우던 나무 같아 청춘이 가도 태양아래 강대나무처럼 서서 태양과 구도를 이루기를 나는 자작나무 숲이나 모든 광장과 골목과 거리 태양의 거리라 부르고 밤이어도 태양이 잠깐 쉬러간 태양의 거리고 우리의 시간마저 태양의 시간이라 부른다. 너무 익숙해졌지만 태양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된다. 끝없이 핵융합반응으로 존재를 고집하지만 100 억년 생존기 중 46 억년을 .. 2023. 5. 26.
정윤천 시인 / 십만 년의 사랑 외 2편 정윤천 시인 / 십만 년의 사랑 1 나에게 닿기까지 십만 년이 걸렸다 십만 번의 해가 오르고 십만 번의 달이 아울고 십만 년의 강물이 흘러갔다 ​ 사람의 손과 머리를 빌어서는 아무래도 잘 헤아려지지 않았을 지독한 고독의 시간 십만 번의 노을이 스러져야 했다 ​ 2 어쩌면, 십만 년 전에 우리와 함께 출발했을지도 모를 산정의 별빛 아래 우리는 이제 막 도착하여 숨을 고른다 ​ 지상의 사람들이 하나 둘 어두움 속으로 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하였다 ​ 하필이면 우리는 이런 비탈진 저녁 산정 위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서로를 알아 보게 되었는가 여기까지 오는데 문득 십만 년이 걸렸다 ​ 잠들어 가는 지상의 일처럼 우리는 이제 그만 잠겨져도 된다 더 이상의 빛을 따라나서야 할 모든 까닭이 사라졌다 ​ 3 천 번쯤 나.. 2023. 5. 26.
이명 시인(안동) / 전이轉移 외 3편 이명 시인(안동) / 전이轉移 마당가 설중매 한 그루 꽃을 피웠을 뿐인데 집이 환하다 봄은 아직 멀었는데 내 마음도 등불 켜놓은 듯 밝다 눈길에 남아 있는 발자국, 기억은 선명한데 가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다리미 하나 홑청이 펴지고 구겨진 마당이 빳빳해진다 눈 감으면 더욱 뚜렷해지는 집의 풍경 겨우내 헝클어진 내 속도 말끔히 펴진다 온몸이 붉게 물든다 이명 시인(안동) / 산중에 살다 보니 산중에 살다 보니 움직일 때마다 목에서 목탁 소리가 난다 등뼈와 고관절에서도 우두둑 법고 소리가 난다 여기저기서 울려 나오는 소리 몸도 이제 절간이 되어가나 보다 곳곳의 울림이 다른 것을 보니 아직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얽히고설킨 것들이 많나 보다 소리 없이 머리는 희고 비틀 때마다 삐걱거리는 어설프고 낡은 몸이.. 2023. 5. 26.
이용헌 시인 / 국가적색목록; 이리篇 이용헌 시인 / 국가적색목록; 이리篇 머리를 아무리 갸우뚱거려도 알 수 없는 무리가 많아요. 머리를 아무리 조아려도 용서할 수 없는 무리가 많아요. 다리를 질질 끌며 달이 지고 달이 달아난 곳에 흥건하게 고이던 어둠 어둠에 머리를 처박고 우리는 본 적도 없는 이리 떼마냥 울부짖었죠. 이리가 그토록 혈족 같을 줄 우리는 알 리 없었지만 암, 알 리가 없고 말고요. 그때까지 우리는 사람인 줄 알았으니까요. 사람 옷을 입고 사람 신발을 신고 있었으니까요. 머리를 쳐드는 순간 총소리가 울렸죠. 총소리는 사냥꾼을 농락하던 이리 왕 로보도 로보의 반려자 브랑카도 당할 수 없었다고 시튼의 동물기에 나오죠. 그렇다고 우리가 이리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실인즉 우리는 다리가 넷이었어야 했어요. 거리를 가로질러 군.. 2023. 5. 26.
이안 시인 / 아홉 살 시인 선언 외 2편 이안 시인 / 아홉 살 시인 선언 난 결심했어 시인이 되기로 선생님이 그러는데 시는 아름다운 거래 난 다른 게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이 되겠다는 거야 아름다운 시를 쓰는 사람이 안 아름다울 순 없잖아? 시인에게는 연필과 수첩만 있으면 된대 그게 시인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무기라는 거야 그 둘만 가지고 세상과 맞서는 거지 아름답지 않니? 백 살까지 쓰고도 남을 연필과 수첩을 모아 두었어 나는 나를 아껴 쓸 거야 자면서도 읽고 쓰고 바라볼 테야 글씨는 작을수록 좋아 이안 시인 / 구석이 되고 싶은 믿는 도끼 나를 믿는다면 말리진 않을게 하지만 그전에 알아 둘 게 있어 네가 한 손으로 들기엔 난 너무 무거워 한쪽은 뭉뚝하고 다른 쪽은 잔뜩 날이 서 있지 딴생각을 하다간 쿵! 발등을 다칠지도 몰라 그런데도 네가 .. 2023. 5. 26.
김상현 시인 / 붕어 김상현 시인 / 붕어 일생을 모로 누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랴 일생을 지느러미 파닥거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랴 딱 한 번 생의 마지막은 자유롭게 흰 뱃바닥을 수면 위에 눕히고 한 쪽 눈은 하늘을 보고 한 쪽 눈은 물속을 보면서 딱 한 마디 고맙다, 힘들게 잘 살았구나. 웹진 『시인광장』 2023년 4월호 발표 김상현 시인 1947년 전북 무안 출생. 1973년 한양대 산업공학과 졸업. 1992년 시 전문지 《시와시학》으로 등단. 2009년 《평화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집 『달빛 한 짐, 바람 한 짐』 『싸리나무숲에 서리꽃 피면』 『노루는 발을 벗어두고』 『사랑의 방식CD』 『기억의 날개』 『어머니의 살강』 『거멀장한 바가지가 아름답다』 『꽃비노을』 등, 장편소설 『미완의 휴식』과 단.. 2023. 5. 26.
이명 시인(인천) / D-195 외 2편 이명 시인(인천) / D-195 날씨는 추워지고 식량은 거의 남지 않았다.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동굴 밖을 나가보지 않았지 만, 매서운 바람은 귀로도 가늠할 수 있었다. 사람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수증기, 어린 아 이의 기침소리, 모든 게 희뿌옇게 보였다. 어쩌면 꿈일 수도 있다고.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구조대는 오지 않을 거야, 너는 반쯤 누운 채 멍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딱히 네 말에 반박을 수 없었다. 눈이 내린다. 누군가 걱정스럽게 중얼댔고, 사람들은 작은 벌레처럼 꿈틀댔다. 조용히 네 손을 잡는다. 이명 시인(인천) / 에이프릴, 그대도 보았소? 4월, 나는 길을 달린다. a3시, 라디오, 음악, 달만한 가로등이 머리 위로 지나간다. 고물 트럭,.. 2023. 5. 26.
배정원 시인 / 불안의 서(書) 배정원 시인 / 불안의 서(書) 오래된 간판에 핀 검버섯 귀 잘린 길고양이의 방전된 눈빛 시궁창 위로 미친 듯이 쏟아지는 진눈깨비 허공을 긋는 늙은 바이올린 주자의 야윈 팔 삼십 년 전 길을 잃었던 거리 다시 또 낯선 길모퉁이에서 문득, 갑자기, 우두커니가 되면 옛날의 치열과 치기가 뒤섞이어 쏟아지는 진눈깨비 수도약국 앞 인사동 거리 웹진 『시인광장』 2023년 4월호 발표 배정원 시인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93년 신춘문예에 시 이 당선. 시집 . 1998년 동시, 동요교육서 . 2023. 5. 26.
이두의 시인 / 물 위를 걷는 사랑 이두의 시인 / 물 위를 걷는 사랑 메마른 철쭉 가슴에 불 지르고 간 봄비가 그리움 어쩌지 못해 사울사울 또다시 와서 이제는 어쩔 수 없다 함께 길을 나선다 안으로 파고든 그를 새나가지 못하도록 가끔 어긋나 뒤틀려도 마음을 다잡으며 잠겨서 죽어도 좋은 이 강가에 이르렀다 물그늘 몸 뒤채면 이내 젖는 모난 사랑 초록이 아우성치는 불면 속에 있는 나는 끝끝내 지켜야 하는 깨끗한 눈물 커진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4월호 발표 이두의 시인 2011년 《시조시학》으로 등단. 경기대학교 한류문화대학원 시조창작 석사 졸업. 시조집 『정글의 역학』, 『그네나비』 출간. 2017년 이영도 시조문학상 신인상, 2020년 열린시학상. 2021년 제5회 서귀포문학상, 2023년 제7회 조운 문학상 수상. 2023. 5. 25.
주석희 시인 / 반지 외 1편 주석희 시인 / 반지 팥배나무가 꽃을 아침과 저녁 허공에 불러내는 동안 산수유 열매가 아이의 자전거 바퀴를 굴린다 쇠창살 담장에 덩굴장미 이제껏 숨겨 놓았던 패를 또 한 장 펴 보이며 무참하게 번지는 한판 대결을 통첩한다 공원 화장실 앞 붓꽃이 최근에 터득한 편년체로 봄을 가까스로 기록하는데 아이의 자전거에서 노인의 손에서 반짝이는 햇빛 오후를 견디는 자전거 바큇살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 사이로 해가 지는 깜박, 희미하게 붓꽃이 저녁을 마저 기록하며 약속을 지키는, 오월 주석희 시인 / 붉은 사막의 표정 사막의 여우가 낙타 발자국을 세며 따라간다 느릿느릿 태양과 낙타와의 거리 여우는 낙타의 그림자를 밟지 않는다 붉은 능선과 달개비 꽃 짓이겨 놓은 하늘빛 사이 하루를 견딘 저녁이 찾아온다 그녀가 여우에게 구.. 2023. 5. 25.
김지녀 시인 / 양들의 사회학 외 2편 김지녀 시인 / 양들의 사회학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울타리를 칩시다 우리 정원이 다 망가졌어요 창문처럼 입들이 열렸다 닫혔다 교회 십자가 하나 세워도 좋을 법한 초원 위에서 양들이 풀을 뜯어 먹는다 눈과 눈 사이가 넓구나 얼굴 옆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두 눈이 귀처럼 달려 양들은 눈이 어둡다 큰 눈은 잘 들을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렇습니까? 전 그냥 결정되면 알려주세요 그대로 따라갈게요 양 한 마리가 갑자기 달려 나간다 그 뒤를 따라 우르르 쫓아가는 것은 양들의 습성 벼랑인 줄 모르고 와르르 떨어져 죽는 줄 모르고 아이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상관없다는 표정 털이 계속 자라니까 신경 쓰여 못 살겠어 일 년에 한 번씩은 온몸의 털을 깎아야죠 그것이 문화인의 자세니까 누가 먼저 할까요? 초원은 고요하다 .. 2023. 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