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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중 시인 / 마트
세계를 번역하면서 마트는 시작했어요. 여기에 실존하는 수많은 신의 얼굴은 우리의 이름으로 통합될 수 있어요. 그래요. 그것은 당신의 심장의 무게를 다는 표정입니다. 가격이라고 편리하게 부를 수도 있겠네요. 피라미드 형태가 세계의 상징이 된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지요. 계층의 어디에 속하든 간에 당신은 마트 안에서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신의 친절한 표정을 보세요. 당신이 죽음의 법정 앞에 설 때까지는 늘 반갑게 인사할 거예요. 그것이 이 세계를 주관하는 법의 표정이라고도 할 수 있죠. 그렇다고 이곳에 오는 일이 딱딱한 법무를 보는 것이라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즐기세요 이 일과를, 세계에 입장하는 사소한 일상의 사건들을. 물론 이 세계에 입장하시려면, 수납 먼저 하세요. 당신은 회원이니까요. 이곳이 야전병원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놀라지마세요. 여긴 기막힌 쇼핑몰입니다. 아주 거대한 창고의 모습이죠. 층층이 놓인 것은 모두 당신의 상품입니다. 그것들이 진열된 모습이 차곡차곡 쌓아 놓은 병상으로 보이는 것은 당신의 과장이에요. 마트. 모든 것은 사실 질병이죠. 우리는 질병마저 사고 팔 수 있거든요. 거래가 질병의 일종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것은 이제 진부합니다. 마트. 그래요. 구입하고 싶으십니까. 지르세요. 바로 그것에서 모든 덧없음이 시작되지만, 이 투명한 덧없음이 말하는 건 간단하답니다. 수납부터 하시죠. 아프지 않아요. 입장은 값싸게 바꿀 수 있지요. 당신이나 나나 이 마트의 입장입니다. 입장의 바깥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이 연결에서 끊어질 수 없어요. 마트의 번역은 모든 연결이며 단일한 얼굴이죠. 이 지상에서 최고의 부자도 마트의 법 앞에서는 모두 평등합니다. 마트의 주인은 마트니까요. 그/그녀는 사자의 서를 들고 저울의 무게를 재듯이 우리가 지불할 수 있는 잔고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세계의 마지막까지. 우리는 다만 투명한 천장을 꿰뚫고 도달하는 저 빛의 은총 속에서 쇼핑할 뿐입니다. 마트.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회원입니다. 수납을 마치셨으면 회원님 이쪽으로 오시죠. 저기 거대한 카트를 끌어 보세요. 당신을 거기에 수납할 수도 있는 카트입니다. 즐기세요. 마트를. 그와 그녀의 모든 얼굴을 한 신의 이름을 부르세요. 마트의 이름에 대한 기원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신의 이름에 대한 오해라고 주장하시는 것도 포함해서. 그것이 마트의 약관입니다. 이 지상의 끝까지 마트의 법이 통치합니다. 당신의 입장을 축하합니다.
김학중 시인 / 바탕색은 점점 예뻐진다
거리는 낮의 지평선으로 빛이 뿌려지는 이마 모든 색깔이 제 모습을 드러내도록 이어지는 순간의 바탕색 길 위에서 나는 뒤돌아서 너를 보고 보는 것은 깊이를 가질수록 겹겹이 두드러지는 두드리는 지금을 기다려왔다는 걸 느끼는 간격 바닥은 빛의 온도를 다 품지 못해 밝아지고 밝아지며 바스락거리고 너의 발걸음은 조금씩 숨겨둔 리듬를 풀고 빛의 색깔로 거리는 빛나고 빛나는 여름이고 여름의 빛 조금은 나의 빛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빛남 환한 머릿결의 너를 만지는 거리의 지금 여기의 모든 것이 배경이 되도록 기울어지는 긴 바탕색 여름의 빛 속에서 다가오는 너를 나는 아직 무어라 부를 수 없어서 미소는 점점 무어라 부르고 싶은 사람의 마음으로 펼쳐지고 펼치고 뒤로 손을 내밀면 가닿을 수 있을 것 같아 너는 안 그런지 몰라도 바탕색은 점점 예뻐지는 걸 따라오지 않는 시간들에 장난을 걸면서 점점, 너는 너의 걸음은 가까워지는데 아름다워지는 순간들은 순간으로 저물어 거리의 바탕색으로 멀어져 간다 빛은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 점점 하늘로 이어진다
김학중 시인 / 시찰단
그들은 오염된 대지에 초대된 시찰단이었다 예정된 날짜에 정해진 시간 동안만 그들은 제한된 지역을 시찰할 수 있었다 거대한 오염수 저장탱크들이 파괴된 도시의 건물들을 대신해 서 있는 도시였다 시찰단을 인솔하는 사람은 이것이 미래의 도시가 갖춰야 할 시설이라고 안내했다 모든 것은 어차피 인간으로 인해 오염될 것이므로 거주 공간 근처에 오염저장탱크를 설치해야 한다고 그들은 이 모습이 단지 조금 일찍 자신들의 땅에 구현된 것이라고 말했다 시찰단은 사실 우리 땅에도 쓰레기와 오염물들을 격리시킬 토지를 확보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지자체마다 그 문제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들을 태운 차량은 저장탱크 사이사이에 버려진 검은 포대들을 무심히 지나쳐 갔다 가끔 폐기물이 된 인부들도 오염토와 함께 폐기한다는 안내가 나왔지만 그런 일들은 시찰단이 보거나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어서 흘려들었다 그들이 우리들의 시찰단이었다 시찰단은 자신들이 원하는 미래의 도시 모습이 잘 구현된 거리를 감탄하듯 보았다 이 모든 것이 과학의 성취군요 놀랍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내려놓고 과학을 얻었으니 역대급의 성과를 얻겠습니다 시찰단은 이미 준비된 데이터들을 건네받으면서 주신 대로 보고하겠다고 활짝 웃었다 시찰단은 약속한 시간에 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랐다 안내자들은 시찰단에게 이 도시가 하나의 이름을 가진 도시라고 소개했지만 그 도시는 하나의 도시가 아니었다 단 하나의 이름을 가진 여러 도시였다 끝없이 노심이 멜트다운하고 있는 발전소가 그 도시들을 연결하고 있었다 계간 『문예바다』 2024년 겨울호 발표
김학중 시인 / 워크맨
생일 선물로 어머니가 사 주신 워크맨 이제 중학교에 들어간다고 꼭 영어 공부하는 데 쓰라고 사 주셨는데 영어 공부는 하지 않고 팝송만 들었다 세상의 모든 영어 문장이 단지 음악일 뿐이라는 듯 뜻도 모르고 들리는 대로 그저 따라 부른 노랫말
워즈 돈 컴 이지 영단어들은 내게 쉽게 와 주지 않고 스텝 바이 스텝으로 귓가에서 걷고 걷기만 했다
외국인을 만나면 머뭇머뭇 입 밖으로 나와 주지 않는 영어가 테이프가 끝나면 다시 처음부터 걸어와 주던 날들 그렇게 걸어 나간 나의 길
아이 디드 잇 마이 웨이.
김학중 시인 / 동전 분수대
동네에 분수대가 생기자 소원을 빌러 사람들이 찾아왔다 어느 날 아침 한 사내가 생수통 하나를 하나 가득 채운 동전을 가지고 분수대를 찾아왔다 그는 분수대에 동전을 묵묵히 던져넣었다 소원이 아니라 하루를 던져넣기 위해 온 그가 가져온 동전들은 처음 보는 외국 동전들이었다 버스 회사 오 년, 누군가 무임승차 때 넣은 외국 동전들을 모으며 버티던 날들 돌아갈 곳이 없는 자들의 기념물인 동전들은 퐁퐁 소리를 내며 분수대에 안긴다 바닥의 동전들은 환전해주지 않아 버려진 동전들과 서로 몸을 포갠다. 분수대에서 하얗게 떨어지는 물방울은 물소리로 동전들을 닦아준다 연인들 몇몇이 소원을 빌고 가고 나무들은 잎사귀를 던져넣으며 내년 봄을 기원했다 분수대는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누구도 고장난 자판기 대하듯 발로 차지는 않았다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이 차비를 빌려갔다 굶주린 사람은 한끼 식사를 위해 동전을 건져갔다 분수대는 말없이 그들의 손을 씻어주었다 젖어도 찢어지지 않는 동전처럼 단단한 소원들을 혼자서만 기록하고 있었다 늦은 밤, 청소부들은 거름으로 팔 낙엽을 쓸어 담고 노인들은 자루에 신문을 주워 돌아갔다 분수는 멈추고 공원엔 작은 가로등 한 개 빛났다 남겨진 동전들은 빛을 받는 행성처럼 빛을 냈고 희미한 물빛이 밤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때까지 돌아가지 못한 사내의 눈가를 몰래 닦아주고 있었다.
김학중 시인 / 잠의 화원
꽃들은 재방송을 보며 졸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도 아무도 깨지 않았다 주인은 꽃들이 흘리는 잠꼬대에 취해 꽃들보다 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손님 몇이 맙소사! 하고 발길을 돌렸다 나는 맙소사는 신의 이름을 호명하는 일이라고 나직이 농담을 해보았지만 점점 깊어가는 잠에 취한 꽃들은 꽃잎이 더 벙글어졌다 나는 꽃다발을 선물로 사기 위해 꽃들의 잠과 함께 머물러야 했다 천장의 형광등은 새것이라 밝았지만 거짓말처럼 눈을 뜨고 자고 있었다 꽃병들 옆에 고요히 꽂혀 있는 햇살을 보니 지구의 자전을 보고 있노라 지루해진 태양도 빗줄기를 흔들며 잠들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옆집 빵가게 에서 풍겨오는 빵냄새에 구름이 부풀고 가로수들은 하품을 하느라 기지개를 켰다가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장미꽃이 아니라 꽃들의 잠을 선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선물할 수 없는 것을 준 꽃집에서 광막하게 넓어져가는 작은 잠들의 화원에서 꽃들의 잠과 깨어나지 않는 주인의 친구가 되어갔다 끝내 지갑을 꺼내지는 못하였다
김학중 시인 / 처음의 노래로 돌아가려 하네
끝에서 끝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서였네 낯선 이의 목소리가 미지를 열 때가 있네 처음 듣는 노래의 첫 소절에게 마음을 모두 내어주듯이 당신의 부름에 나는 그대를 향해 서네 그 순간 당신은 그대의 목소리로만 열 수 있는 문을 여네 그것은 이미 나의 문이 아닌 낯선 이의 문 나를 닮았으나 나를 벗어나 있는 미지의 빛으로 밝아진 문턱에서 경첩이 펼쳐지는 소리를 듣네 놀랍게도 그 안에 그대의 모습이 있네 이미 와 있었던 모습으로 내가 그대를 안다는 것이 내 삶의 유일한 비밀이라는 듯 비밀은 온기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이여 이 모든 다정함은 이미 그대의 것이네 다시 있을 낯선 곁의 온기여 가까이에 오는 그대를 나는 부르지 못하고 당신은 먼 곳으로 떠나는 모습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네
미지의 문은 끝까지 닫히지 않은 채로 흘러나오는 온기에 목소리를 맡기네 미지는 그렇게 처음의 노래로 돌아가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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