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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하 시인 / 울진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7. 24.

이하 시인 / 울진*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소요하던 초저녁 달빛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질펀하던 식당을 나선 길, 컴컴하고

노래방 불빛 해무처럼 자욱하다

아는 이 드물게 만나도

뉘엿한 표정이 되고 만다

갈지자(之)로 비포장한 세월

낯선 무너미를

내처 넘어 지낸 탓이다

닻을 잃은 빈 배의

상처로

나만 서 있다

낯익어 환한 개활지로

한때의 계절이 지나갔는가

이름도 잊힌 노숙자의 저녁으로 내몰린 내지는 허방 속에

서 술렁거렸다

중심을 벗어나

눈 어둑한 내력 탓인가

행인의 시선으로 들어가 보지만

바람 차가운 유리창에 비친

붉은 얼굴이

담장에 기댄

오랜 내력처럼 무너져 내린다

그림자의 키가 주검보다 헐겁다

바람 허전하게 드나드는

골목이

첫사랑을 떠나보낸 사내의

입처럼 무겁다

빼곡한 속내 내보이던 이웃들

낡은 창들도 지워지고 없다

왁자하게 술집 창을 두드리던 소란들도 오래전

불문不問에 가라앉은 듯

옥호 지워진 문은

웅크린 불빛이

입을 막고 있다

기억의 행간을 더듬는

미아처럼

외롭게 늙어 간 지명 속에 서 있다

묵혀 둔 미행의 나들이에

들킨 여운은 탁류의 깊이로 흘러간다

무덤이 된

 

*울진:경상북도울진

 

 


 

 

이하 시인 / 구부러진 슬픔

 

 

붉은 낮달이

저무는 바다에 있습니다

 

오래 뜨겁게 지녔던 것을

그만 보내려는지

 

기척 없는

파도처럼 걷고 있는 사내의

뒷모습은 식어 있습니다

지난 시절의 연흔을 헤아리려는지 수평선에 맞닿은

고요하던 그의 눈은

내 눈시울로 굽이쳐 들어설 듯 그렁그렁했습니다

 

내 여백의 구석에도 떠나지 않은 한 철이 있었음을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서쪽 하늘도 더는 헤아릴 수 없어 검붉은

허공 속으로

발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이하 시인 / 귀가歸家

 

 

 1.

 바람도 돌아갈 곳이 없을 때 길을 잃어버립니다. 흑백영화 속 무성의 화면으로 들어서는 주인공처럼 어두운 길로 빠져드는 오후와 같은 경우일 겁니다. 구름에 갇혀 떠도는 수평의 소문처럼 오늘은 내일을 위한 뼈대를 남기지 못한 때문입니다. 무량으로 피우던 화염의 거리를 눈부시게 배회하던 꽃향기도 뒷걸음치는 누설처럼 파장의 난전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어제의 약속들은 너울지고 무용한 것들 위에 무욕의 내일로 돌아가지 못할 흔적만 남을 것입니다. 찬란의 허공에서 씨실처럼 쏟아지던 소나기 듣는 날이면 창 너머 풍경을 헤매어 뜨겁던 내 울렁증도 가까스로 멈춥니다. 절애의 그늘에 몸을 내주던 바다 노을 떠나고 물빛의 기억도 핏빛으로 지워져 혼몽에서 깨어난 저녁인사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빙의 계절을 지나온 서로의 손을 놓치고 녹아내리던 눈사람의 눈동자는 시선을 잃을 겁니다. 우듬지에서 울리던 마른 겨울 종소리를 듣던 어깨 굽은 풀목도 낯선 문장의 속 빈 여울로 이미 흘러든 까닭입니다. 꿈의 형해形骸도 바람에 털리고 허리 꺾일 때마다 진동하던 여름을 품어 눅진한 비린내 젖던 가슴 가장자리에 바삐 내려선 무서리에 지친 혼백들 막막히 언 서러움에 떨고 섰습니다.

 

 2

 뒤엉킨 파랑에 갇힌 섬처럼 나는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뒤적여 볼 수 없는 어수선한 뒷골목처럼 그리움에 진저리 치던 떠난 바람에게 빚을 또 얻어야 합니다. 먼지 쌓인 오늘과 틈을 보이던 내일로 창을 내고 잠들려는 이유입니다. 귀환하지 못한 기억 탓에 까마귀가 해 저물도록 우는 까닭이 커튼사이로 번질 아침 햇살이 벌써 두려운 때문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느낌은 언제나 냄새처럼 깊숙이 밀려드는 밤의 일탈과 같은 발견이라 스스로 믿기 때문입니다. 부산하던 놀이터 허공에 걸린 그네에 부푼 아이들 웃음이 실려 저녁 달빛 머리가 바삐 다가올 시간이 되었습니다. 새벽에 남은 어둠으로 흘려 쓴 시詩는 차오른 달빛 고요의 쓸쓸함을 위해 읽어주어야 할 겁니다. 제 몸의 비늘을 쏟을 구석을 찾아 허정한 걸음으로 걸어온 그림자와 나는 여전히 동행입니다. 사서四序에 묻혀 귀 어두운 발길은 행로를 잃은 뒤란과 더 가까워진 때문입니다. 노을이 꺼내놓은 어스름도 망연으로 허물어지고 흰 머리칼 떨어진 자리에 바람의 꽃대를 새긴 베갯잇 모서리 올이 풀릴 때마다 이별의 숨소리 자욱히 들렸습니다. 휘어지던 대숲의 공명에 등 기대고 새벽어둠은 또 그림자를 가지러 나서야*할 일만 남습니다.

 

* 신동호 시인의 시집「그림자를 가지러 가야한다」를 변용.

 

웹진 『시인광장』 2024년 2월호 발표​

 

 


 

 

이하 시인  / 금동풍탁金銅風鐸

 

 

폐사지 어스름에서 파란의 우는 소리 듣는다

 

벌판에서 몰려온 바람은 솟구치다 꽃잎처럼 떨어진다

 

수없이 새긴 오롯한 마음 모아 사라진 퇴창의 빈틈을 부르고

내 느린 발소리도 숨죽여 천년을 웅크린 탑을 본다

적막은 통곡 없이 무너진 탑을 돌아

옛 자취에 취해 노을의 앞섶에 스러져 있다

묵언의 몸으로 단단한 화두를 벼렸던 돌탑의 문은

엇나간 사랑처럼 쩌귀를 잃어버렸다

오랜 기원은 흩뿌린 마른 꽃잎의 바랜 이름표를 달고

바람의 상처를 휩싼 입동立冬의 허물처럼 무겁게 있다

 

밀경密經에 박혀 별빛에 밤새 타버린 것인지

대웅보전을 울리며 경을 외던 소리, 금강의 숨결로 스미고

낡고 희미한 기둥만 달빛 뼈대의 흔적으로 있다

전하지 못한 불국토佛國土의 영면에 들지 못한 원願이 되어

허공의 파편으로 눕혀져 있다

구원의 행로는 유랑하던 소란에 의탁한 건가

오랜 바람의 그림자 된 무덤으로 버려져

고요에 씻긴 그늘의 몸을 가리고 있다

 

검붉은 어스름은 몰아쉬는 풍탁의 여운을 끌고

내 초라한 눈빛을 지나고 가슴을 휩쓸고 가려니

기운 탑에 매달려 수천만 번 그 흔들림의 여백에

의탁한 풍탁만이 청록으로 물든 궁륭穹窿을

두드려 망연한 몸으로 울고 있다

 

독경에 출렁이던 일몰 더욱 붉어지고

태우지 못한 몸 금강의 바람에라도 씻겨

숨 끊긴 종소리 빈 들판을 떠돌다

무간無間에 갇혀 어쩌지 못하는 여린 떨림 속을

나 우두커니 서

어둠에도 일렁이는 천년의 풍탁

깊이 울리는 어진 소리 듣고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7월호 발표

 

 


 

 

이하 시인 / 묵적黙寂

 

 

 창틈을 비집고 든 날 선 소음이 귓등을 할퀴고 나더니, 수 해를 넘긴 입선入禪의 앞섶이 헤지고 솔기마저 풀어져 바람벽처럼 기댄 숲머리의 빈집 한 채가 땅거미처럼 주저앉았다. 타오르는 햇살 넝쿨에 묶여 지탱해온 몸, 바람에 씻긴 형해形骸는 말간 바람결처럼 스르르 풀어지고 있었다. 두텁던 장정裝幀은 벗겨진 지 오래. 눈비의 상흔에 갈퀴진 마른 가지부터 어깨가 근심처럼 차례로 풀어지고, 경로를 잃은 바닥에다 풀썩 몸을 부려놓았다. 물결에 떠도는 마른 꽃잎처럼 낮달의 틈을 파고들어 붉어진 놀란 어스름이 바삐 꼬리를 감추었다. 이끼 핀 무릎은 풍상을 넘지 못하고 숱한 계절을 지낸 행적의 갈피도 없다. 되돌아볼 수 없도록 혼백을 허공에 흩어버리고, 와불臥佛의 남은 화두話頭에다 약전略傳을 적어 묵언의 강에 흘려보냈다.

 

 오래 눌러둔 슬픔도 다 쏟아버렸는가, 얼개 없이 숭숭한 속내는 달빛으로 건너가고 있다. 추렴한 사계四季의 나이테만 겹겹이 빗살무늬 떠도는 발목에 남겼다. 끝내 천지간에 휘돌 여흔을 뿔뿔이 숲에 날리고, 어림의 세월을 짊어진 노을이 마른 등을 쓰다듬어도 무너진 배후는 벌써 어둑해졌다. 연흔의 그늘만 하현의 뒷장처럼 붉고 시퍼렇게 흔들리고, 여백을 지운 자리에 밤 별들 우두커니 첩첩 서 있다. 묶어 둔 줄이 늘어진 그림자, 무성했던 생애를 잊은 푸른 생기의 잎새들 천천히 숲을 끌고 있었다.

 

 내 허정한 빈 걸음은 온기 없는 하현처럼 희미하고 허기진 저녁으로 들고 있었다. 아득한 기억의 당신 얼굴만, 젖은 내 눈으로 밀려들던 꽃비 아득히 날리던 봄날이었다.

 

-계간 『상상인』 2024년 여름호 발표

 

 


 

 

이하 시인 / 반란斑爛

 봄꽃 또 피었네 향기를 훔친 바람이 꽃잎 흩뿌리는 날, 별빛 꽃잎 위로 쏟아지고 마른 몸 누인 나무 아래, 허공에 넘치는 은하수를 보며 찰나를 홀로 건너기에 좋은 밤이네

*

 분별없이 따라나선 길 위의 시간, 이제 보내야겠네 기대의 끝이 여행이라 고집했지만 실은 사소한 우연의 시작일 뿐이었네 팽팽한 시위를 견딘 오늘은, 내일 무너지는 그리움은 연속의 또 하루와 같더군 멀리 날아갈 수 없는 깃 빠진 화살이란 걸 알았다면, 꽃길 밟는 봄날처럼 낙엽 위에 흘려 쓴 필흔이나, 눈밭을 들끓으며 걷지는 않았을 것이네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건너오게 했는지. 어깨 휘청거리고 발을 자주 헛딛곤 했네 너무 멀리 와 되돌아갈 수 없었네 얼룩을 훔치던 흐린 창의 실금에 갇혀 지낸 것이었네 이슬이 가지에서 서성대는 동안에도 아침은 오고, 기쁨의 시간들 지나가는 계절에도 있었네 주사위를 굴리며 빨래처럼 펄럭였을 뿐, 차례의 끝이 이제인 것 알아 참 다행이네 아침이면 들어서던 두려움과 백야행의 호기심을 거두고, 우화를 마친 풀벌레같이 들길 끝. 홀로 선 나무 아래로 돌아가려 하네 순례의 길로 덮치던 적막의 파랑을 그만 떠나 보내야겠네

*

 빼앗길까 쫓기며 또 쫓던 걸음, 이제 오래된 시계처럼 천천히 지나가네 휩쓸고 간 것인지, 길 위의 외로움이 낡아질 때마다 그림자로 서성였네 허기를 삼켜 잠을 할퀴던 밤. 불 켜지면 영원히 그림자로 남을까 두려워 두리번거렸네 말을 섞은 적 없는 어두운 하늘이 그래서 좋았네 새벽이 오기 전 이마에 떨어지는 별이나 날개를 펼쳐 빌딩 숲 벼랑을 건너는 슬기로운 박쥐들을 부러워했네

*

 번거로운 시선이 없어 정적의 메아리 홀가분함을 누렸다네 사무친 아픔이 바람 때문이 아니라 가지 끝에서 흔들리는 눈물 부르는 것이란 것을 알았네 비명을 지르는 밤은 기록 없는 시간의 여백으로 남고, 모서리를 맴돌던 소란에 묻혀 그 너머를 볼 수 없게 되더군 눈 저물고 노을처럼 속박이 짙어진 것이었다네 깜깜해지고, 걸음 무거운 것도 그쯤이었네

*

 격정의 떨림과 비겁한 두려움의 흔적은 환락에 찌든 먼지에 섞인 변경의 문 앞에 쌓인 환멸만 남은 폐쇄된 모텔. 빈 약통과 남은 소주병은 조난신호처럼 몸을 굴리고, 부스러기 남은 색 바랜 과자 봉지가 질척한 반란을 메우는 맑은 창밖으로 밀려가고 있다 바닥은 허물 벗은 오랜 절망이 검고 눅진한 꽃으로 피어 있다

*

 폐허의 지붕을 지탱하던 벽이 쓰러지고 숨소리는 새벽닭처럼 길게 울다 끊겼다 한참이나 눈물에 떠 있었다 가라앉지 못하고 흐를 뿐, 손 내밀어 보지만 닿을 곳 없어 밀려 갈 수도 없다 안개처럼 피지 못하고 위태한 무릎을 꺾고서야 너덜을 벗어날 수 있었다 멸절의 자유에 든 눈의 고요는 유치된 고도를 바라보며 바람을 부르고 있다 접은 날개가 부서져 꽃잎처럼 흩어졌다

 창틈의 빛은 누가 부르기 전까지 한참을 꽃잎 위에 머뭇거렸다 봄, 흩어지는 날이었다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8년 9월호 발표

 


 

이하(李下) 시인

경북 울진에서 출생. 본명 : 이창호(李昌浩), 경희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2021년 웹진 『시인광장』 제10회 신인상을 톰해 등단. 시집 『반란』. 2023년 경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한국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