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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보 시인 / 등짐 꿈에서는 그 꿈이 꿈인 줄 모르듯이 우리 사는 이 세상도 아마 그런갑다 꿈에서 얽힌 일들 깨고 나면 다 풀리듯 이 세상 근심 걱정도 깨고 나면 다 풀릴 걸 등짐만 공연히 지고 등이 휘게 가는 갑다.
-시집 『날아가는 은빛 연못』에서
임보 시인 / 주문진 새벽 바다
동해 바닷가에서 밤을 새워 술을 마셔 보았는가? 주문진 갯가 횟집 다락에서 밤을 새워 바다를 마셔 보았는가? 그대들의 체중으로 바다는 절반쯤 기울고 그대들의 내장에서도 새벽 파도가 일어나는 그 소리를 들어 보았는가? 그걸 아직 모르면 시 쓰는 주태백이 그대 친구 몇 놈 데불고 해당화 필 무렵 한번 해 보게 한 보름쯤은 그대 몸에서 파도 소리가 철석일 거야 바다 바람이 일렁일 거야.
-시집 『날아가는 은빛 연못』에서
임보 시인 / 강론
베풀어라 네가 가진 것이 없다고 주저하느냐? 가난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다 네 마음이 넓으면 부자다 네 마음을 나누어 주도록 하라 그것은 아무리 써도 닳지 않는다
네가 얻고자하는 것이 무엇이냐? 땅을 얻고자 하느냐? 사람을 얻고자 하느냐? 네 앞에 있는 것들은 이미 네 것이다 울을 치려고 하지 말라 울을 치면 울 밖의 것들이 들어오기 어렵다 울을 치지 않으면 다 네 것이 된다
세계는 너로 하여 더함도 덜함도 없다 네 흔적을 내려고 억지를 부리지 말라 앞서 가겠다고 서두르지 말라 네 권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네 손으로 뽑아낸 한 포기 잡초도 네 권능의 밖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허술한 차림의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 그래도 그들이 정직하다 자신이 없는 자들이 외모에 마음을 쓴다 치장을 좋아하는 자의 속은 볼 것 없다 쓸데없이 모양을 내지 말라.
-시집 <산상문답> 도서출판<움>
임보 시인 / 마누라 음식 간 보기
아내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 때마다 내 앞에 가져와 한 숟갈 내밀며 간을 보라 한다.
그러면 "음, 마침 맞구먼. 맛있네!" 이것이 요즈음 내가 터득한 정답이다.
물론, 때로는 좀 간간하기도 하고 좀 싱겁기도 할 때가 없지 않지만
만일 “좀 간간한 것 같은데" 하면 아내가 한 입 자셔 보고 나서 “뭣이 간간허요? 밥에다 자시면 딱 쓰것구만!" 하신다.
만일 "좀 삼삼헌디" 하면 또 아내가 한 입 자셔 보고 나서 “짜면 건강에 해롭다요. 싱겁게 드시시오" 하시니 할 말이 없다.
내가 얼마나 멍청한고? 아내 음식 간 맞추는 데 평생이 걸렸으니
정답은 “참 맛있네!”인데 그 쉬운 것도 모르고....
임보 시인 / 참 시인
수십 권의 시집을 이미 간행하셨다고요? 참, 대단하십니다. 수많은 문학상을 받으신 바 있다고요? 참, 훌륭하십니다. 거국적인 큰 문학단체의 장이었다고요? 참, 위대하십니다. 80이 넘은 문단의 원로 시인이라고요? 참, 존경스럽습니다. 그러나, 참 시인은 작품의 분량이나, 수상의 경력이나 감투의 관록이나, 등단의 이력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가 참 시인인가요? 불의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는 지사인가요? 세상을 등지고 고고하게 살아가는 은자인가요? 지사도 은자도 참 시인의 요건은 아닙니다. 참 시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시에만 매달린 순진하고 명청한 시쟁이입니다. 시를 생각하느라 끼니를 잊기도 하고 시를 엮느라 밤을 지새우기도 하지만 세상이 알아주기를 크게 바라지 않고 세상이 몰라봐도 크게 낙심하지 않는. 한평생 한 편의 명품을 벼리기 위해 더운 영혼을 쏟는 시의 대장장이 시의 구도자(求道者)입니다.
임보 시인 / 청산무
푸른 산 속 개울가 큰 너럭바위 위에 휘청거리며 움직이는 한 사람이 있네 짚신에 누더기 걸친 백발의 늙은이 한 손엔 청려장 또 한 손엔 호리병 불그레한 얼굴에 들썩이는 어깨 흔들리는 품새로 보아 춤을 추나 보네 앞으로 몇 걸음 뒤로 몇 걸음 좌로 몇 발짝 또 우로 몇 발 넘어질 듯 일어서고 쓰러질 듯 살아나고 호리병에 매달렸다 지팡이에 의지했다 밀고 당기며 끊어질 듯 이어가는 느리게 뒤뚱대는 게으름뱅이 춤사 철여장의 장무(杖舞)요 호리병의 병무(甁舞)로세 근심 떨친 무애무요 불로장생 선무로다 개울물의 현금소리 딱따구리 비파소리 청성모도 들썩이고 청 노루도 껑충이고 흰 구름도 너울너울 청솔가지도 휘청휘청 얼씨구나, 온 청산이 신명난 춤판 일세
임보 시인 / 이상(李箱)의 연애편지
시인 이상(李箱, 1910~1937)이 스물다섯에 쓴 연애편지가 80년 만에 온 천하에 공개되었다 홀로된 미모의 재원 최정희(崔貞熙, 1912~1990) 작가에게 1935년 12월에 보낸 연서라고 한다
상대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자 술이라도 한잔 걸치고 쓴 것인지 필체도 거칠고 문장도 횡설수설 천재 이상의 글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볼품없는 이 연서가 공개된 것을 저 세상의 이상이 만일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키도 하다 아마도 얼굴을 찌푸릴 것만 같다
이 편지의 소장자는 최정희가 재혼해서 얻은 둘째 딸인데 무슨 연고로 이를 공개한 것인지 망자의 인권은 문제가 안 되는지 모르겠다
이상이 타계한 것이 1937년이니 만약 그 사랑이 성취되었더라면 좀더 버티며 살 수 있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참 불쌍한 이상이다
임보 시인 / 주인
나무는 제가 서있는 땅의 주인이고 새는 제가 날고 있는 하늘의 주인이다 그럼 너는? 밟고 있는 땅의 주인이라고? 아니, 네가 살고 있는 시간의 주인이다.
임보 시인 / 어느 농부의 편지
성님, 나도 막내아들 한 놈은 꼭 정치를 가르칠라요. 어떻게 신나도록 적들을 엎어칠 수 있는가를 가르칠라요. 다리를 걸든지, 배꼽을 물어뜯든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눕힐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칠라요. 아니, 엎어쳐 눕혀 놓고 다시 또 짓밟아 주면서도 가슴을 펴는 그 배짱을 키워 줄라요.
말하는 법도 가르칠라요. 달콤하고 고소한 말씨로 놈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진실은 절대로 말하지 않는 법을 가르칠라요. 양파의 껍질처럼 속마음은 싸고싸고 깊이 감추어 두었다가 때가 오면 어두운 밤 독사처럼 아가리를 몰래 들어 적의 발꿈치를 물어뜯는 그 교활한 예지를 가르칠라요.
맹세 같은 것이 다 뭐 말라 비틀어진 거다요? 그런 건백 번을 안 지켜도 상관없다고 가르칠라요. 성님, 어떻게 하든지 목만 틀어 잡으면 안 되것소? 그리하여 나도 대원군이 되면 원 좀 풀어 볼라요. 사둔네 팔촌 눈먼 꼽추면 어떻것소? 八道 내 친척 오둥이잡둥이 다 모아 놓고 잔치잔치 벌일라요. 우리집 개새끼도 호강 좀 시킬라요. 뼈다귀 한 개도 못얻어 먹고 그동안 고생만 한 우리집 개새끼에게 그린벨트 몇 천 평 띠어서 개장도 하나 크게 지어 줄라요.
성님, 나도 중동에 간 내 막내아들놈 어서 불러다가 정치공부시킬라요. 나도 이젠 이 웬수놈의 땅좀 그만 파고 살아 볼라요.
임보 시인 / 詩人의 회신
농부여, 땅을 파는 일 그것이 그래도 아직은 제일 낫네, 헛된 꿈 꾸지 말고 자네 아들에게 그 땅의 정직을 가르치게.
세상살이는 어차피 훔치는 일이지만 고기를 낚는 어부보다 사냥을 하는 포수보다 풀과 나무들을 속여 그 씨를 훔치는 그 일이 그래도 아직은 제일 낫네.
농부여, 자네의 그 솜씨로 고기도 새도 못 속이는 그 솜씨로 어이 저자의 사람들을 속여 장사를 하며 그것도 못하는 주제에 어이 천하의 민중들을 밟고 그들의 매운 땀을 훔치겠다는 것인가?
농부여, 보기에는 자네가 세상의 제일 아래 있어서 가장 춥고 배고픈 듯하지만 우리들 순수의 자(尺)로 세상을 고쳐 재면 이 지상의 맨 위에 제왕처럼 그대의 자리는 그렇게 높네, 농부여, 제왕이여, 자네 아들에게 어서 그 왕도를 가르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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