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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15159

이기영 시인 / 그들의 이별 외 2편 이기영 시인 / 그들의 이별 들꽃은 꽃잎으로 바람을 움켜잡습니다 바람은 놓아 달라 합니다 들꽃은 뿌리 탓에 따라가지 못하고 흔들게 하다 흔들리다 속절없이 서로의 손을 놓아버립니다 바람 불 때 들판에 가보세요 이별도 아름다운 소리 낼 때 있답니다 -시집 - 이기영 시인 / 별빛에 싸여 있던 이야기 산중턱 마을이 저물면 별들이 먼저 달려온다 평상에서 잠자다 오줌누러 감나무 밑에 가면 은하수는 흐르다 산봉우리에서 여러 조각으로 흐르고 장마 질 때 불어난 강 건너 매어진 빈 배 뱃사공 부르던 머슴아는 누굴 만나러 애태웠는지 할머니께서 들려주지 않아도 마을 입구 나리꽃은 여전히 별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시집 이기영 시인 / 느린 우체통 꽃편지지에 간절한 시 한 편 싣고 머뭇거리던 손길을 기억하다 붉은 노을 우체통.. 2023. 5. 23.
박영근 시인 / 초상집 외 2편 박영근 시인 / 초상집 상주도 잠이 들어 차일막엔 죽은 이 옛말도 들리지 않고 마늘밭 자리 비닐막 노름판만 불이 훤하다 술애비 금렬이아재는 만원 한장짜리 개끗발도 붙지 않는지 오늘도 흑싸리 개평꾼 묘자리에 물이 날까 지관 어른은 남몰래 걱정인데 길게 흐르던 별똥별 하나 들판 끝으로 툭 떨어진다 상여엔 두레 울력도 노래도 없구나 이백년 묵은 당산나무가 그 텅 빈 몸통으로 간신히 잎을 피워올리는 봄밤에 박영근 시인 / 내가 떠난 뒤 흰 낮달이 끝까지 따라오더니 여주 강물쯤에서 밝은 저녁달이 된다 늙은 비구 하나이 경을 읽다가 돌에 새긴 비문 속으로 돌아간 뒤에도 내가 바라보는 강물은 멈추지 않는다 내 안에서 오래 그치지 않는 그대 울음소리 강물이 열지 못한, 제 속에 잠겨 있는 바위 몇 개 나 또한 오늘 밤.. 2023. 5. 23.
최규리 시인 / 단 하나의 세포였을 때로 외 1편 최규리 시인 / 단 하나의 세포였을 때로 물에 뛰어든다 어떤 맥락도 없이 물에 속성을 따른다 뼈대를 거슬러 퇴화한 꼬리뼈의 연대기 속으로 깊은 숲속에 집을 짓는 자유인처럼 훌쩍 떠나고 훌쩍 나타나는 삐딱한 기울기처럼 늑대의 울음을 만드는 달빛이 사실은 전설이 되고 싶어서 그대 안의 블루가 되어 굽힐 줄 모르는 심해에서 물결의 마음도 그러했을 거라고 믿고 싶기에 불행했던 기억은 없었는데 왠지 억울해져 울컥거림을 따돌리는 방법인지도, 꿈 밖으로 벗어나면 큰일 나는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머리카락이 일렁인다 직진이던 관절의 관성을 멈추려고 젤리피쉬를 따라 투명하고 말랑한 빛을 따라 머리카락은 마음껏 펼쳤다가 몸을 감싸 안는다 캄캄했던 이불 속으로 숨 막혔던 옷장 속으로 옷의 진동이 스케치북을.. 2023. 5. 23.
강윤미 시인 / 멜순* 외 2편 강윤미 시인 / 멜순* 길섶 가시덤불 속에서 용케도 멜순을 찾아내시는 어머니 재잘거리는 내 눈이 서운할까 마주치시는 것도 잊지 않고 말에 간간이 추임새을 넣어주면서도 그녀의 등허리는 보이지 않는 그것을 향해 있다 두 눈 부릅뜨고 그녀의 눈길을 따라가 보지만, 내 눈에는 엉킨 실타래같은 가시덩굴 뿐 선밀 나물은 나를 피해 요리조리 숨어 있다가 어머니가 부르면 얼른 달려와 다소곳이 앉는다 그 부름으로 환해지는 산보길 멜순도 허겁지겁 봄을 불러와 꽃을 피운다 내 입에서 나오는 선밀 나물과 어머니의 멜순 길바닥에서 엉켜 뒹구는 그 말들을 모아 어머니는 버무리신다 데쳐도 향기는 손끝에 남고, 어머니 몸엔 멜순향 나는 파스가 숨어 있다 멜순* : 선밀나물의 제주도 방언 강윤미 시인 / 벽에 세 들어 사는 몽골 여자.. 2023. 5. 22.
이병국 시인 / 그곳에 없다 외 2편 이병국 시인 / 그곳에 없다 에덴비디오방에서 남의 콘돔을 치우고 아침을 걸었다 살얼음 낀 거리가 미끄러웠다 잠긴 문 앞에서 미끄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조금 늦게 열어도 되는 문이 열리고, 옷매무새를 채 다듬지도 못한 애인은 맨살을 난감해했다 어떤 일도 그곳에서는 없었다는 듯이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방은 좁고 서로의 숨소리를 나누어 갖던 우리, 서로의 바깥이 되어 문밖을 서성이고 우리는 사라져도 다시 떠오르는 사이여서 자꾸 미끄러지고 미끄러져서 미끄러웠다 차가운 입술로 안녕을 건넨 적도 있었다 이쪽이 저쪽으로 멀어지고 안부가 끝나지 않은 뒤죽박죽의 날들 각자의 방향에서 무모하고 없는 것 투성이로 가지런했다 이병국 시인 / 풍선껌 얼룩진 보도블록을 짊어진 채 부풀어 오른 기대를 삼킨다 단물이 전부 빠질 때까.. 2023. 5. 22.
하상만 시인 / 나무그림자 외 1편 하상만 시인 / 나무그림자 원목을 잘라 만든 탁자나 도마 속에는 검은 무늬가 있는데 그건 나무를 닮은 것 같아서 나무가 자기 그림자를 속에 숨겨 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검은 부분은 사실 죽은 세포들이고 단단해진 그 세포들 덕에 나무는 꼿꼿하게 서 있을 수 있게 되는데 삶이 기댈 곳은 죽음뿐인 것 같다 죽은 사람을 생각하다 보면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려고 이렇게 살아 있는 거구나 희열 같은 것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은 나의 그림자였다 처음엔 살아서 물을 나르는 것이었다가 햇볕에 반응하고 나를 푸르게 하는 것이었다가 죽어서는 내 속에서 너는 살아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계간 『문파』 2023년 봄호 발표 하상만 시인 / 내일 내일이 오려 하네 내게 그런 것이 남아 있네 받고 싶은 것은 주지 .. 2023. 5. 22.
권현형 시인 / 실용적인 독서 외 3편 권현형 시인 / 실용적인 독서 책을 읽겠다고 매일 타던 자전거를 고삐처럼 매어놓고 내려왔다 책은 무슨 책, 바닷가 여관 비릿한 아랫목 똬리를 틀고 한 사나흘 앉았으니 남의 살 생각이 간절하다 시집 위에 냄비째 올려놓고 라면 먹을 때도 계란 생각 장자 위에 밥솥째 올려놓고 맨밥 먹을 때도 고기 몇 점 생각 창틀에 턱 올려놓고 밤새 바라보는 파도가 젖은 아랫도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읽히기도 한다 생각은 생각을 낳는다 두꺼운 책일수록 실용적이다 책을 읽겠다고 매일 타던 소를 잡아 먹는다 권현형 시인 / 밥이나 먹자, 꽃아 나무가 몸을 여는 순간 뜨거운 핏덩이가 뭉클 쏟아지듯 희고 붉은 꽃떨기들이 허공을 찢으며 흘러나온다 봄뜨락에 서서 나무와 함께 어질머리를 앓고 있는데 꽃잎 하나가 어깨를 툭 치며 중심을 흔들어.. 2023. 5. 22.
김언희 시인 / 귀류(鬼柳) 외 2편 김언희 시인 / 귀류(鬼柳) 밤비 내리는데 머리카락 같은 비 휘날리는데, 휘감기는데 鬼柳, 鬼柳, 비 맞는 귀신버들 기름한 잎잎이, 기름한 눈을 뜨는데 물 위에다 빗방울은 자꾸 못 보던 입술들을 피워 내는데, 뜰채로 뜰 수도 없는 입술들을 피워내는데, 모르는 이름들이 실뱀처럼 내 귓속으로 흘러드는데, 밤비 내리는데, 비 맞는 귀신버들 잎잎이 살을 떠는 가지에 앉아, 너는 내게 자꾸 돌멩이를 먹이는데, 살도 뼈도 없는 나에게 김언희 시인 / 이모들은 다 이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사내들은 입이 보지란다 얘 얼굴에 달려 있는 저게 보지야 깔깔대던 이모들은 다....... 사과에 달린 돼지 꼬리 배배 꼬인 나사 자지 창틀에 올라앉아 함께 부르던 노래들은 다....... 얘 얘, 저기 저 삼센티 오신 나뽈레옹 .. 2023. 5. 22.
유정이 시인 / 싸움의 기술 외 2편 유정이 시인 / 싸움의 기술 귀에서 자꾸 기차 바퀴 소리가 들려, 덜커덩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지팡이를 흔들며 들어오네 농담처럼 생긴 너무 오래 계속되는 공연은 딱 질색이야 내 혐오는 너무 질긴 게 탈이지 예고도 없이 불이 나간 객차가 컴컴한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만 실컷 울어보자고 결심했어 그러나 불이 켜지고도 나는 줄곧 울고 있었지 계략이 떨어진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는 뜻 스스로 호랑이라고 믿는 날랜 살쾡이 어느새 손바닥에 이겨 붙었던 흙먼지 탈탈 털고 휘파람을 부네 먼저 그렇게 시끄러운 소리를 귓속에 장착해 둔 그러나 고작 너는 눈 꼬리 긴 살쾡이 나는 차라리 우아한 패배를 원하네 귓속에서 자꾸 기차 바퀴 소리가 들려 명백하고도 무거운 이 바퀴를 달고 그리 슬프지 않은 저.. 2023. 5. 22.
김조민 시인 / ​​감, 잡다 외 1편 김조민 시인 / 감, 잡다 도시에서 유학하던 아버지는 배가 고프면 설익은 감을 따 아랫목에 넣어두고 배가 고플 때마다 손을 넣어 가만가만 감을 만져보셨다는데, 단단한 감이 물러지기 시작할 즈음 밤이 깊어가고, 만지면 보일 듯 말 듯 파문처럼 감의 껍질 위로 동그라미가 뜨는데 침이 고이고, 이불 속에서 설익은 감을 조심조심 눌러보며 나중에는 엄마의 젖가슴도 그렇게, 또 나중에는 갓 태어난 내 정수리도 그렇게 조심조심 눌러보셨다는데, 아직도 감나무를 보면 설익은 감을 따 가만가만 만져보시는 아버지, 초록빛이 도는 감 위로 아버지가 비치고 아버지는 약관의 청년이 되고 초록 감이 붉게 익는 것만이 세상 가장 큰 소원이던 그때가 청년의 눈 위에 되비치는데, 그런 아버지를 볼 때면 나는 내 바로 전의 생을 조심조심.. 2023. 5. 22.
엄원태 시인 / 극지에서 외 2편 엄원태 시인 / 극지에서 1 온난화로 조차지(祖借地)처럼 변해버린 허드슨 베이, 겨울 한 철 제외하면 더이상 북극곰의 제국이 아니다. 안 그래도 북극곰은 고독한 짐승, 너무 외로워서, 고독의 총량이 무려 구백 킬로그램에 달한다. 그래서 화이트아웃과 물범의 잠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극지의 봄은 따뜻해서 겨울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오로지 제 몸에 저장된 고독을 태우면서 버텨야 한다. 가을이 끝날 무렵이면 북극곰의 고독은 기껏 삼백 킬로그램 정도로 비쩍 말라붙는다. 북극토끼나 사할린뇌조는 그동안 세번 몸을 바꿔야 한다. 2 얼룩물범도 외롭기는 마찬가지다. 너무 외롭고 심심해서, 물범은 애써 잡은 먹이 목도리팽귄을 갖고 논다. 상처 입은 먹잇감을 수면에 가만히 띄워놓고 무슨 공처럼 입으로 툭툭 치며 논다. 그.. 2023. 5. 22.
김효은 시인 / Sea glass 김효은 시인 / Sea glass 누군가를 담았던 병 파편의 모양은 바뀌었지만 기원의 색을 잃지 않았다 고래가 삼켰다가 배설하고 불가사리의 죽음이 으깨어져 흔적 없이 사라진 동안에도 녹지 않았다 다정하게 품어주던 세계에게 모서리만 조금 떼어줬을 뿐 베고 베이고 찌르고 찔리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서로의 피를 흘리기도 하면서 마시기도 하면서 형형하게 다듬어진 생채기의 조각들 오랜 시간을 건너 여기 해변으로 왔다 끓어오르던 노을 차디찬 달빛 파도에 휩쓸려 기억의 모래밭에 당도했다 작디작은 울음들이 옹알이처럼 손바닥 위에 놓여 있다 눈동자 속으로 빛과 어둠 열기와 냉기가 동시에 비집고 들어온다 반복해도 익숙해질 수 없는 매혹 어떤 끝이 시작된다 계간 『시와 징후』 2023년 봄호(창간호) 발표 김효은(金曉垠) .. 2023. 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