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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규리 시인 / 단 하나의 세포였을 때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3.

최규리 시인  / 단 하나의 세포였을 때로

 

 

 물에 뛰어든다 어떤 맥락도 없이

 

 물에 속성을 따른다 뼈대를 거슬러 퇴화한 꼬리뼈의 연대기 속으로 깊은 숲속에 집을 짓는 자유인처럼 훌쩍 떠나고 훌쩍 나타나는 삐딱한 기울기처럼

 

 늑대의 울음을 만드는 달빛이

 

 사실은 전설이 되고 싶어서 그대 안의 블루가 되어 굽힐 줄 모르는 심해에서 물결의 마음도 그러했을 거라고 믿고 싶기에

 

 불행했던 기억은 없었는데 왠지 억울해져 울컥거림을 따돌리는 방법인지도, 꿈 밖으로 벗어나면 큰일 나는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머리카락이 일렁인다

 직진이던 관절의 관성을 멈추려고

 젤리피쉬를 따라

 투명하고 말랑한 빛을 따라

 

 머리카락은 마음껏 펼쳤다가 몸을 감싸 안는다 캄캄했던 이불 속으로 숨 막혔던 옷장 속으로 옷의 진동이 스케치북을 매일 백지로 만들었지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던 엄마와 옷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과 젤리향이 났던 지우개와

 

 늘 바다를 기다렸다 바다는 오지 않았으나 바람이 그치지 않았고 입을 옷이 없다는 엄마와 옷을 그리며 바다로 뛰어드는 백지들이 옷이 되고 무늬가 되는 펄럭이는 날들 속에서

 

 투명하고 말랑한 젤리가 자랐다

 

 잠은 잠적하기 좋은 방

 머리카락은 나를 묶기 좋은 잠

 

 탯줄을 목에 감고 자궁벽을 찢으며 남자도 여자도 아니었던 때로 수정란을 부수고 당신의 꼬리를 잘라 나팔관을 거슬러 착 달라붙는 애착 인형이 필요하지 않았던 깊은 잠 속으로

 

 날아오르는 물이 되어 투명하고 말랑한 단 하나의 세포였을 때로

 

―시집 『인간 사슬』, 천년의시작, 2022.

 

 


 

 

최규리 시인  / 프랜시스 베이컨*이 저녁을 준비하며

 

 

 지방을 제거하기 위해 칼을 뽑는다 간 떨어지는 이야기가 기다린다 복도를 걷는다 복도는 복도의 기분이 있다 어떤 방향인지 모르게 한다 문을 연다 실험실이다 주방이 필요했는데 상관없다 물컹이는 물체를 내려놓는다 맛있는 표본을 만들어야지 핀으로 사지를 고정한다 가슴에 선홍색 핏방울이 맺힌다 하얀 와이셔츠를 벗는다 피를 묻히기 싫다 배를 가른다 내장들이 꿈틀댄다 날것의 생생함을 촬영한다 잊지 않도록 기록하고 보관한다 영상을 폐북에 올린다 캡처한다 내가 정지되었을 때 빼앗긴 날들은 벽에 걸렸다 박제처럼 살아온 날들이 수집되었다 액자 안의 얼굴이 조각난다 밤을 가른다 납작해진 얼굴에 생기를 넣자 입맛이 돋는다 육즙이 흐른다 금속으로 긁는 소리가 난다 선반 위에서 유리병이 흔들린다 유리병 안에는 술에 잠긴 뱀이 잠을 자고 있다 밀폐된 몸이 용기를 갖게 한다 누군가의 머리를 냉장고에 넣어둘 용기와 다리 한쪽을 강가에 버릴 용기를 준다 연쇄적으로 손목이 발목이 생겨난다 용기에 담긴 얼굴이 선반에 있다 썩지 않도록 잠에 담겼다 늑골에 달라붙은 조직은 제거되기 어렵거든 깊은 고립은 잘 떨어지지 않아 잘 도려내려면 잘 연마된 칼이 필요해 질긴 감정을 훼손한다 누렇게 달라붙은 안쪽을 썬다 여름에 어울리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영국의 표현주의 화가

 

계간 『시와 징후』 2023년 봄호(창간호) 발표

 

 


 

최규리 시인

서울 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2016년 《시와 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질문은 나를 위반한다』와 『인간사슬』이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이며 동서문학회 회원, 시와세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