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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병국 시인 / 그곳에 없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2.

이병국 시인 / 그곳에 없다

 

 

 에덴비디오방에서 남의 콘돔을 치우고 아침을 걸었다 살얼음 낀 거리가 미끄러웠다

 

 잠긴 문 앞에서

 미끄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조금 늦게 열어도 되는

 

 문이 열리고,

 

 옷매무새를 채 다듬지도 못한 애인은 맨살을 난감해했다

 

 어떤 일도

 그곳에서는 없었다는 듯이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방은 좁고

 서로의 숨소리를 나누어 갖던

 우리,

 

 서로의 바깥이 되어

 

 문밖을 서성이고

 

 우리는 사라져도 다시

 떠오르는 사이여서

 

 자꾸

 

 미끄러지고 미끄러져서 미끄러웠다

 

 차가운 입술로 안녕을 건넨 적도 있었다 이쪽이

 저쪽으로 멀어지고

 안부가 끝나지 않은 뒤죽박죽의 날들

 

 각자의 방향에서 무모하고 없는 것 투성이로 가지런했다

 

 


 

 

이병국 시인 / 풍선껌

 

 

얼룩진 보도블록을 짊어진 채

부풀어 오른 기대를 삼킨다

단물이 전부 빠질 때까지

손바닥만 한 공허가 스며든다

숨이 펄럭인다

누구도 다가갈 수 없도록  

길이 끊긴 곳에서

너는 너를 받아든다

유유히 날아가는 것들은

바닥에 닿아 있다

머뭇대는 만큼 풍선의 크기가 작아진다

흥정하듯

숨을 불어 넣는다.

펄럭이는 네가 아직

뒤돌아보지 않는다

 

너는 은종이로 하루를 감싼다

비어져 나온 실패가 멀리 왔다

돌아갈 수 없는 반복을 씹는다

둥글게 부풀 불안이 보푸라기처럼 떠오른다

채울 수 없어

허물어진다

이미 보낸 숨이 가쁘게

너를 잡는다

파문은 안으로 밀려온다

뒤집어도 꺼낼 수 없는 것들이 펄럭인다.

물끄러미

터진 입술을 바라본다

네가 들어가기에 충분하다

 

 


 

 

이병국 시인 / 매일의 라테

 

 

이를테면

너의 세계라 부르기로 한다

섞이지 않으려고

오로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려고

최선을 다하여

견딘다 아닌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이란

그렇다는 것이다

떨어진 나날이 홀더에

가득하다

평범이

우리를 가른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어서

미끄러진다 마음이 헝클어지고

너를 마주했던 슬픔이

선명하여 거짓말을 꾸민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매일은 무수해서 찰랑이는 농담이고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병국 시인

1980년 인천 강화에서 출생. 인하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인하대대학원 석사 수료.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 시집 <이곳의 안녕>. 2019년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겨울(冬)' 동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