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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현형 시인 / 실용적인 독서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2.

권현형 시인 / 실용적인 독서

 

 

책을 읽겠다고 매일 타던 자전거를

고삐처럼 매어놓고 내려왔다

책은 무슨 책, 바닷가 여관

비릿한 아랫목

똬리를 틀고 한 사나흘 앉았으니

남의 살 생각이 간절하다

시집 위에 냄비째 올려놓고

라면 먹을 때도 계란 생각

장자 위에 밥솥째 올려놓고

맨밥 먹을 때도 고기 몇 점 생각

창틀에 턱 올려놓고

밤새 바라보는 파도가

젖은 아랫도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읽히기도 한다

생각은 생각을 낳는다

두꺼운 책일수록 실용적이다

책을 읽겠다고 매일 타던

소를 잡아 먹는다

 

 


 

 

권현형 시인 / 밥이나 먹자, 꽃아

 

 

나무가 몸을 여는 순간

뜨거운 핏덩이가 뭉클 쏟아지듯

희고 붉은 꽃떨기들이

허공을 찢으며 흘러나온다

 

봄뜨락에 서서 나무와 함께

어질머리를 앓고 있는데 꽃잎 하나가

어깨를 툭 치며 중심을 흔들어 놓는다

누군가의 부음을 만개한 꽃 속에서 듣는다

 

오래 전 자본론을 함께 뒤적거리던

모임의 뒷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던

 

그 큰 키가 어떻게 베어졌을까

 

촘촘히 매달려 있던 꽃술들이 갑자기

물기 없는 밥알처럼 푸석푸석해 보인다

입안이 깔깔하다

 

한 번도 밥을 먹은 적 없이

혼자 정신을 앓던 사람아 꽃아

 

모를 일이다 누가 아픈지

어느 나무가 뿌리를 앓고 있는지

꽃아, 일 없이 밥이나 먹자

밥이나 한 끼 먹자

 

 


 

 

권현형 시인 / 스며들다

 

 

울음송곳으로 누가 자꾸

어둠을 뚫고 있나

한낮 산책길 저수지

수면에 어른대는 당신을

잠깐 들여다보았을 뿐인데

밤새 환청에 시달린다

 

물이 운다는 생각

난생 처음 해 본다

그것도 동물성의

울음꽃떨기를 피워

깊이 모를 바닥에서 송이째

끝없이 밀어 올리는 듯하다

 

저수지 안에서 살아가는

황소개구리가 내는 소리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도

누구의 설움이 조금씩 누수되어

내게로까지 스며들었는지

그때 물이 울었다는 생각

거두어지지 않는다

 

 


 

 

권현형 시인 / 젖은 생각

 

 

마른 빨래에서 덜 휘발된 사람의 온기,

 

달큰한 비린내를 맡으며 통증처럼

 

누군가 욱신욱신 그립다

 

삼월의 창문을 열어 놓고 설거지통 그릇들을

 

소리나게 닦으며 시들어가는 화초에 물을 주며

 

나는 자꾸 기린처럼 목이 길어진다

 

온 집안을 빙글빙글 바람개비 돌리며

 

바람이 좋아 바람이 너무 좋아 고백하는 내게

 

어머니는 봄바람엔 뭐든 잘 마르지 하신다

 

초봄 바람이 너무 좋아 어머니는

 

무엇이든 말릴 생각을 하시고

 

나는 무엇이든 젖은 생각을 한다

 

-시집 『밥이나 먹자, 꽃아』 중에서 -

 

 


 

권현형 시인

1966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 강릉대 영문과 졸업.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 박사 과정 수료. 1995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중독성 슬픔』과 『밥이나 먹자, 꽃아』 『포옹의 방식』이 있음. 2006년 한국 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2009년 제2회 미네르바 작품상 수상.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