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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조민 시인 / ​​감, 잡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2.

김조민 시인 / 감, 잡다

 

 

 도시에서 유학하던 아버지는 배가 고프면 설익은 감을 따 아랫목에 넣어두고 배가 고플 때마다 손을 넣어 가만가만 감을 만져보셨다는데, 단단한 감이 물러지기 시작할 즈음 밤이 깊어가고, 만지면 보일 듯 말 듯 파문처럼 감의 껍질 위로 동그라미가 뜨는데 침이 고이고, 이불 속에서 설익은 감을 조심조심 눌러보며 나중에는 엄마의 젖가슴도 그렇게, 또 나중에는 갓 태어난 내 정수리도 그렇게 조심조심 눌러보셨다는데, 아직도 감나무를 보면 설익은 감을 따 가만가만 만져보시는 아버지, 초록빛이 도는 감 위로 아버지가 비치고 아버지는 약관의 청년이 되고 초록 감이 붉게 익는 것만이 세상 가장 큰 소원이던 그때가 청년의 눈 위에 되비치는데, 그런 아버지를 볼 때면 나는 내 바로 전의 생을 조심조심 더듬어 기억해 내곤 하는 것이다

 

 


 

 

김조민 시인 / 아직 겨울이라 나의 언어는 빈약합니다

 

 

겨울이 되면 이 거리는 바람으로 가득합니다

사람들은 서둘러 얼굴을 감싸 쥔 채 거리를 떠났고

떠나지 못한 지난 계절의 부스러기가

알 수 없는 소문과

더 낡아버린 보도블록 사이 죽은 비둘기와

벌어진 틈을 찾지 못해 죽지 못한 비둘기들이

바람 속에서 닳고 있습니다 나는

이 헛된 거리의 웅덩이에 쪼그려 앉아

늙어가는 바람의 형식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어요 단지

왔다가 가 버렸고 다시 오지 않는 신념들에 대해

허우적거리는 자음과 모음에 대해

아직 새벽 여섯 시가 되지 않아 잠들지 못하는

단어들의 불평에 대해

바람에 귀를 기울이지만 들리는 것은

오로지 바람뿐이라 나의 언어는 빈약합니다

 

웹진 『님』 2023년 3월호 발표

 

 


 

김조민 시인

2013년 계간 《서정시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2019년 미래서정 문학상 수상. 현재 GBN경북방송 편집위원.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