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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정이 시인 / 싸움의 기술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2.

유정이 시인 / 싸움의 기술

 

 

귀에서 자꾸 기차 바퀴 소리가 들려, 덜커덩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지팡이를 흔들며 들어오네

농담처럼 생긴

너무 오래 계속되는 공연은 딱 질색이야

내 혐오는 너무 질긴 게 탈이지

예고도 없이 불이 나간 객차가

컴컴한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만 실컷 울어보자고

결심했어

그러나 불이 켜지고도 나는 줄곧 울고 있었지

계략이 떨어진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는 뜻

스스로 호랑이라고 믿는 날랜 살쾡이 어느새

손바닥에 이겨 붙었던 흙먼지 탈탈 털고

휘파람을 부네 먼저 그렇게 시끄러운 소리를 귓속에 장착해 둔

그러나 고작 너는 눈 꼬리 긴 살쾡이

나는 차라리 우아한 패배를 원하네

 

귓속에서 자꾸 기차 바퀴 소리가 들려

명백하고도 무거운 이 바퀴를 달고

그리 슬프지 않은 저녁에 당도하고 싶을 뿐이야

가도 가도 캄캄한 울음 속을

그 남자 지팡이를 흔들며 걸어간다

결국 이 싸움의 패인은 울음이었으나

그렇다고 네가 이겼다는 증표는 아니야

어느 온순한 영화의 반전처럼

이 울음의 기차는 또다시 너라는 간이역

농담처럼 생긴

 

너무 오래 계속되는 공연을 덮치게 될 것이므로

 

 


 

 

유정이 시인 / 커피볶는 시간

 

 

대개는 정교하다 모두의 옆모습

비트가 센 오션드라이브Ocean Drive*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리 와

수월하게 건널 수 없는 것들은 때로

매혹적이야.

앞이 있으니 뒤가 있고

그러니 흔들어 볼래?

비벼도 좋아

벗어도 좋다는 말이지

소리를 지르며! 진짜처럼 울어볼래?

진짜라고 말해볼래?

 

낮과 밤처럼

그렇게 두 쪽으로 나뉘는 걸 택하지 그래

그걸 흠결이라고 부른다면

그래 그렇게 말해도 좋아

나와 나는 잘 벗겨지지 않아

설마 탈피가 쉽다고 말하는 거니?

맛과 향 어느 쪽으로든

끝까지 가야 한다면

뜨거운 쪽으로 가자

부서지는 곳으로 가자

잘 익은 비트

정점 다음에서 질러대는 소리

 

충분히 시끄럽구나 너는

그래그래 그렇게 우는 것도

나쁘지 않아

잘 구워졌다면 이제

뒤집어볼 시간이 되었다는 말이야

잘 빻아진 나를 헤집어볼 시간이라는 뜻이지

 

이제 말해봐

 

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니?

 

 


 

 

유정이 시인 /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운동화 끈을 고쳐맨다

풀어진 끈에 매달린 불안한 소문의

머리채를 손가락에 걸어 단숨에 잡아당긴다

바닥을 디디자 단단해지는 길

그러나 버스는 오지 않는다

산양 전갈 페가수스의 머리칼을 다 세는 동안

운동화 둥근 코끝으로 바람의 혀가 한 차례 핥고 지나간다

 

언젠가 한 번은 지나쳤을

녹색 페인트칠 벗겨진 창가에서 마시던 차 한 잔

그러니까 결국 지나온 어디쯤의 금요일 같은

휘어진 길 그 너머의 생처럼

뒤틀린 브래지어 끈이 자꾸 등을 간질이는 동안

나는 수없이 오지 않은 버스를 놓치는 중이다

 

저녁에 닿기 위하여

죽은 나무가 제 몸을 훑으며 들려주는

휘파람 소리를 듣기 위하여

휘파람 소리 끝에 생겨난다는 우물에

얼굴을 비추어 보기 위하여

 

끝내 결별할 수 없는 것들을 두고

당신이 저물도록 서 있던 마른 강물 끝

오래된 마을로 가기 위하여

둥글게 몸을 숙이고 다시

운동화를 고쳐맨다 오래된 당신이

단단히 묶인다

 

 


 

유정이 시인

1963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 1986년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과정. 1993년 《현대시학》을 통해 〈이사〉 등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내가 사랑한 도둑』, 『선인장 꽃기린』과 동화집 『이젠 비밀이 아니야』, 시 해설집 『현대시 함께 읽기』가 있음. 2002년 '동화 읽는 가족' 으로 푸른문학상 수상. 현재 홍익대학교 교양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