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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언희 시인 / 귀류(鬼柳)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2.

김언희 시인 / 귀류(鬼柳)

 

 

밤비

내리는데

머리카락 같은 비

휘날리는데, 휘감기는데

鬼柳, 鬼柳, 비 맞는 귀신버들

기름한 잎잎이, 기름한

눈을 뜨는데

물 위에다

빗방울은 자꾸

못 보던 입술들을 피워 내는데, 뜰채로

뜰 수도 없는 입술들을

피워내는데, 모르는

이름들이

실뱀처럼 내 귓속으로 흘러드는데, 밤비

내리는데, 비 맞는

귀신버들

잎잎이 살을 떠는 가지에 앉아, 너는

내게 자꾸 돌멩이를

먹이는데, 살도

뼈도 없는

나에게

 

 


 

 

김언희 시인 / 이모들은 다

 

 

이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사내들은

입이 보지란다 얘

얼굴에 달려 있는 저게

보지야 깔깔대던

이모들은

다.......

 

사과에 달린 돼지 꼬리

배배 꼬인 나사 자지

창틀에 올라앉아

함께 부르던

노래들은

다.......

 

얘 얘, 저기 저 삼센티 오신

나뽈레옹 오셔! 아저씨들의

기럭지를 한눈에

알아맞히던

이모들은

 

이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바람 부는 날

빼도 박도 못하는 말벌의 거시기를

오락기 레버처럼

쥐고 흔들던

으아리들은

 

언니 보지 코 고는 소리에 밤새 잠을

설쳤어! 니 보지 가래 끓는 소린

어떻고! 아침부터

왁자하던

큰꽃으아리들은

 

 


 

 

김언희 시인 / 나는 참아주었네

 

 

 아침에 맡는 입 냄새를, 뜻밖의 감촉을 참아주었네, 페미니즘을 참아주고, 휴머니즘을 참아주고, 불가분의 관계를 참아주었네, 나는 참아주었네 오늘의 좋은 시를, 죽을 필요도 살 필요도 없는 오늘을, 참아주었네, 미리 써 놓은 십년치의 일기를, 미리 써놓은 백년치의 가계부를, 참아주었네 한밤중의 수수료 인상을, 대낮의 심야 할증을 참아주 었네 나는, 금요일 철야기도 삼십년을, 금요일 철야 섹스 삼십년을, 주인 없는 개처럼 참아주었네, 뒷거래도 밑 거래도 신문지를 깔고 덮고 참아주었네, 오로지 썩는 것이 전부인 생을, 내 고기 썩는 냄새를, 나는 참아주었네, 녹슨 철근에 엉겨 붙은 시멘트 덩어리를, 이 모양 이 꼴을 참아주었네, 노상 방뇨를 참아주었네, 면상 방뇨를 참아주었네, 참는 나를 참아주었네, 늘 새로운 거짓말로 시작되는 새로운 아침을, 봄바람에 갈라터지는 늙은 말 좆을,

 

 


 

김언희 시인

1953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경상대학교 외국어교육과 졸업. 198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트렁크』와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뜻밖의 대답』, 『요즘 우울하십니까?』, 『보고싶은 오빠』가 있음.  이상문학상, 청마문학상, 2004년 '박인환 문학상' 특별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