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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하상만 시인 / 나무그림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2.

하상만 시인 / 나무그림자

 

 

원목을 잘라 만든 탁자나 도마 속에는

검은 무늬가 있는데

그건 나무를 닮은 것 같아서

나무가 자기 그림자를 속에 숨겨 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검은 부분은 사실 죽은 세포들이고

단단해진 그 세포들 덕에 나무는

꼿꼿하게 서 있을 수 있게 되는데

삶이 기댈 곳은 죽음뿐인 것 같다

 

죽은 사람을 생각하다 보면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려고 이렇게 살아 있는 거구나

희열 같은 것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은 나의 그림자였다

 

처음엔 살아서 물을 나르는 것이었다가

햇볕에 반응하고 나를 푸르게 하는 것이었다가

죽어서는 내 속에서

너는 살아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계간 『문파』 2023년 봄호 발표

 

 


 

 

하상만 시인 / 내일

 

 

내일이 오려 하네

내게 그런 것이

남아 있네

받고 싶은 것은 주지 않고

주고 싶은 것을 주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처럼

내게도 능력이 있네

너를 좋아하는 능력

네가 없으면 나는 무능력하네

천천히 차를 마시네

천천히 내일이 올 수 있도록

내가 하려는 일은 자주

소용이 없네

네가 내게 온다면

아름답게 너를

오해해 줄 텐데

가까운 길을 가르쳐 주어도

가던 길로만 가는 사람처럼

내일이 오려 하네

그런 것이 내게

남아 있네

 

-시집 『추워서 너희를 불렀다』, 걷는사람, 2022.

 

 


 

하상만 시인

1974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 동국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2005년 《문학사상》신인상에 〈우물〉 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간장』 『오늘은 두 번의 내일보다 좋다』 『추워서 너희를 불렀다』 등. 제9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2013년에는 제9회 김장생문학상 대상 수상. 현재 경기도 대광중학교의 교사. 수원 청명고등학교 교사.